“사람이 병들면 반드시 중국의 얻기 어려운 약을 구하니, 이는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뿐만 아니라, 약은 구하지 못하고 병은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민간의 옛 늙은이가 한 가지 약초로 한 병을 치료하여 신통한 효력을 보는 것은, 그 땅의 성질에 적당한 약과 병이 서로 맞아서 그런 것 아닐까?”
위는 세종 때 발행된 의서 ≪향약집성 방(鄕藥集成方)≫ 서문의 말입니다. 어떤 이는 한의학이 중국 중의학을 표절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람의 몸과 그 사람이 태어난 고장의 흙은 하나라는 뜻의 '신토불이(身土不二)'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아무리 중의학이 뛰어나다 해도 그것이 우리 겨레에게 잘 맞을 리가 없기에 우리만의 의학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향약집성 방(鄕藥集成方)≫ 서문은 가르쳐줍니다. 이는 중국 사람과 조선 사람은 소리와 기운이 달라서 말과 문자가 다르다며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과 같은 정신입니다.
엄격한 유교적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도 몸치장에 유행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남자가 귀걸이를 하는 풍조입니다. 선조실록 6권, 5년(1572) 9월 28일조에 보면 젊은 사내들이 귀를 뚫고 귀걸이 하는 풍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비망기(備忘記)로 승정원에 임금이 명을 내렸다. “몸과 머리털 그리고 피부 모두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효(孝)의 시초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젊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걸이를 달아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일체 고치도록 안과 밖에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일러라.” 지금이야 젊은 남자들이 귀걸이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당시엔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하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벌까지 받았던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