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조임금이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낳은 장헌세자(사도세자, 1735~ 62)를 압니다. 장헌세자는 2살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지만 노론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등을 내세워 모함한 탓에 결국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지요. 그 장헌세자 장조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 1735~1815)의 합장릉이 융릉(隆陵)인데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비참하게 죽은 장헌세자의 시호를 사도(思悼) 곧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라는 뜻으로 지었고 ≪한중록(恨中錄)≫을 남긴 혜경궁 홍씨에게도 혜빈(惠嬪)이란 호를 내렸지요. 장헌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에 있었는데, 정조가 임금에 오르면서 바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에는 이곳으로 묘를 옮겨 융릉이라 하였으며, 고종 때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懿皇后)로 올렸습니다. 같은 사적 206호 안에는 장헌세자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 합장릉이 있지요.
노리개는 여성의 몸치장으로 한복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허리 등에 다는 패물로 궁중에서는 물론 양반과 일반 백성들까지 널리 즐겨 쓴 장식물입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귀부인들이 허리띠에 금방울이나 비단향주머니를 찼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 후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옷고름에도 찼으며,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옷고름에 달았습니다. 궁중의식이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달았고, 간단한 것은 평소에도 달았는데 양반들은 집안에 전해오는 노리개를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범발톱노리개는 호랑이발톱 두 개를 마주 대어 둥글게 대고, 그 위를 은판으로 싸서 만드는데 호랑이가 악귀와 액을 물리쳐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랑이발톱을 구하기가 어려운 탓으로 범발톱노리개는 소뿔이나 은으로 대신 만들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