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허기 달래준 '제2의 쌀'에서 다양한 맛과 수출로 대변화
최초 '삼양라면' 배고픔 해결… 60년대 삼양 시장 점유율 80%대로 독주● 대한민국 라면의 역사
한국일보
라면이 50번째 생일을 맞았다. 한국에 처음 라면이 소개된 건 1963년 9월 15일. 삼양식품이 출시한 '삼양라면'이다. 당시 라면은 한국전쟁 후 식량난에 허덕이던 국민들의 허기를 달래줬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제2의 쌀'이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라면은 국민음식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인의 라면 사랑은 세계에서 단연 으뜸이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지난해 35억2,000만 개의 라면을 소비했다. 1인 평균 소비량 72.4개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라면은 경제성장과 국민의 기호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왔다.
그 사이 수많은 식품회사가 라면사업에 진출했고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뒤안길로 사라진 회사나 제품도 많다. 그동안 온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라면. 그 역사를 되돌아봤다.
배고픔 해결 위해 도입
라면은 1963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당시 라면을 처음 들여 온 회사는 삼양식품. 한국전쟁 이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값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다는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의 판단 때문이었다. 전 명예회장은 1961년 정부를 설득해 신용장을 개설했다. 그러나 생산시설이나 노하우가 전무해 라면 생산이 불가능했다. 전 명예회장은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라면회사였던 '묘조라면'으로부터 라면 제조기술을 전수받기 위해서였다.
전 명예회장은 한국의 궁핍한 식생활을 호소하며 기술 이전을 부탁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당시 라면 제조기술은 일본 내에서도 '신기술'로 여겨졌다. 군사기술에 버금갈 정도의 기밀이었다. 그럼에도 전 명예회장은 수개월에 걸쳐 통사정을 했다. 눈물 어린 전 명예회장의 모습에 감동한 묘조라면 사장은 생산공정과 배합비율 등 모든 기술을 이전해 줬다. 이로써 1961년 삼양식품 설립 2년 만인 1963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탄생했다. 그러나 첫 출시 당시 라면은 옷감이나 실, 플라스틱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끓여먹는 방법도 생소했다.
라면을 알리기 위해 삼양식품 직원과 가족들은 극장과 공원 등지를 돌며 1년 이상 시식행사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 라면은 곧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삼양라면의 출시가격은 개당 10원. 어려운 식량사정과 고가의 곡물가를 고려해 가난한 서민도 손쉽게 사서 먹을 수 있도록 값을 정한 것이다. 라면은 국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줬다. 그러면서 얻은 별명이 '제 2의 쌀'이다. 그러나 처음 3년간 삼양식품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시설 투자와 원료비, 관리비 등을 감안하면 10원은 턱없이 낮은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양식품은 7년 동안 단 한번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이윤 보다 서민의 배고픔을 1순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라면시장 확장과 대변혁
그렇게 수년 후 삼양식품은 흑자로 돌아섰다. 특히 1965년 정부가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혼분식 정책을 장려하면서 라면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산업이 됐다. 자연스레 시장은 급성장하게 됐다. 이때 많은 식품회사들이 앞다퉈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다.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은 1965년 '롯데라면'을 출시했다. 이후 '풍년라면'(풍년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아리랑라면'(풍국제면), '해피라면', '스타라면' 등 새제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삼양식품의 저가정책에 가격도 올려보지 못하고 적자에 허덕이다 도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가 원료를 사용하며 근근이 연명하던 일부 회사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유일하게 농심 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이후 새마을운동 등 경제적 변화를 맞이하면서 라면의 품질이 높아졌다. 기존 닭고기 육수 대신 소고기를 원료로 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농심은 '소고기라면'과 '농심라면'을 출시했다. 이에 맞서 삼양식품은 '쇠고기라면'을 선보였다. 승부의 결과는 1970년대에 나타났다. 60년대 80% 안팎이던 삼양식품 점유율은 60% 선까지 떨어졌다. 여전히 삼양식품이 '왕좌'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농심이 30% 후반대까지 추격하며 라면시장의 재편을 예고했다. 그러던 1980년대 라면시장은 대변혁의 시기를 맞는다. 먼저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면서 많은 업체들이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야쿠르트는 1983년, 청보는 1985년, 빙그레는 1986년, 오뚜기는 1987년(청보 인수합병) 각각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자연스레 라면의 다양성과 고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시기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된 배경이다. 국민 라면으로 통하는 '신라면'을 비롯해 너구리와 짜파게티, 비빔면 등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당시 라면시장에서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1위 자리를 지켜오던 삼양식품의 아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튼튼하던 점유율은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5년 라면의 시장구도에 '이변'이 생기게 된다. 농심이 사발면과 너구리, 안성탕면 등 히트상품의 인기에 힘입어 1985년 처음으로 삼양을 뛰어넘어 라면 시장 1위에 오른 것이다. 국내서 라면사업이 시작한 지 22년만의 일이다. 삼양라면은 재기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한다. 1989년 검찰은 삼양식품이 '공업용 우지(牛脂·쇠고기 기름)'를 사용했다고 발표하면서다. 이후 서울고등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며 오명을 벗을 수 있었지만 삼양식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본 후였다.
라면업계 도약과 해외 진출
이후 1990년대는 라면업계의 도약기에 해당한다. 제품 다양화가 본격화됐다. 왕뚜껑과 튀김우동, 오징어짬뽕, 생생우동, 수타면, 신라면큰사발 등 다양한 맛을 가진 제품과 용기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장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선 것도 이 무렵이다. 이 시기 다양한 종류의 제품들이 출시, 소비자들의 입맛을 만족시켰다. 물론 모든 라면이 성공을 거둔 건 아니다. 소비자의 눈길을 끌기위해 '무리수'를 두다 제대로 손길을 한번 받지도 못한 채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라면'도 적지 않다.
농심 쌀탕면(1990)과 머그면(1993년), 팔도 쇼킹면(1997년)과 케찹라면(1998년), 오뚜기 채식면(1998년), 빙그레 매운콩라면(1998년), 한국야쿠르트 랍스타맛 왕라면(2000년) 등이 대표적이다. 해당 제품들은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산이 중단됐다. 2000년대는 국산 라면의 해외 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시기다. 농심은 중국 심양, 미국 LA에 현지 공장을 설립하는 등 해외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빙그레가 2003년 라면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현재의 4강(농심ㆍ삼양식품ㆍ팔도ㆍ오뚜기) 구도로 재편됐다.
그러나 이밖에 큰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던 2011년 라면업계에 '하얀 국물' 열풍이 불었다. 팔도가 '꼬꼬면'을 출시하면서다. 여기에 삼양식품이 '나가사끼 짬뽕'을 내놓으며 '하얀국물 라면 붐'에 동참했다. 라면 시장 규모는 2조원대 올라섰고 삼양식품과 팔도의 점유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러나 하얀국물의 인기는 채 2년을 가지 못했다. 하얀국물이 지난 수십년 빨간국물에 길들여진 소비자 입맛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다.
따라서 최근 라면 시장의 트렌드는 '빨간 국물'로 돌아섰다. 신라면과 안성탕면, 너구리, 삼양라면 등 빨간 국물 4강은 건재하다. 여기에 업체들은 고추비빔면, 진짜진짜, 불닭볶음면, 남자라면, 열라면 등 맵고 강한 맛의 빨간 국물 라면 신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50년이 지나도 국민들이 선택한 라면 맛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한 라면업계 관계자는 "국내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맛은 전통적인 '매운맛'"이라며 "하얀국물 등 트렌드가 반영된 라면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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