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한라의메아리-----/오늘나의하루

by 자청비 2018. 9. 3. 17:26

본문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 시인. 아마 내가 고등학교 1학년쯤 때였다. 지금도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세대를 건너뛰면서 오랫동안 10대 청춘들에게 사랑받아온 라디오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에 박인희씨가 낭송하는 '목마와 숙녀'가 흘러나왔다. 아마 대부분 10대때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물론 감수성에 따라 약간의 받아들이는 차이는 있었겠지만. 요즘이야 인터넷이 좋아서 생각나는 싯구절 몇마디를 치면 금방 검색되겠지만 그 때는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도 구경못할 때였으니 어디가서 이 시를 찾아야 할 지 몰랐다. 그렇게 한참 지난 뒤 우연히 이 시낭송을 녹음하게 됐고, 녹음된 테이프를 몇번 반복하면서 시를 모두 옮겨놓게 되었다. 옮겨놓은 시를 몇 번이고 읽으면서 이런 감성적인 시를 쓴 박인환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예비고사에 매몰된 고고생의 현실은 예비고사에 출제될 가능성이 없는 것에 대한 탐구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박인환은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박인환의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국문학과에서 시에 대해 공부하면서 고교졸업후 5.18직후인 1980년대초 냉혹하던 대학시절에 알게 된 저항시인 김수영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할 기회를 갖게 됐다. 김수영에 대해 공부하다보니 절친이자 라이벌로 박인환이 떠올랐다.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은 모던이즘을 추구하며 동인집을 펴내기도 했지만 이후에 가는 길은 많이 달랐다.

당대에는 섬세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 호탕해 보였던 박인환이 소심하면서도 늘 사회와 사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김수영보다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10대 소녀의 감성을 촉촉히 적시기만 했던 박인환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3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시인 이상을 추구하고 김수영과 함께 1950년대 모던이즘을 열었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한계였을까. 아니면 요절한 탓이었을까. '댄디보이'라던 박인환이 추구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늘 술과 함께 하고, 시인 이상을 흠모하며 대중적 인기가 많았던 그였지만 그의 시세계는 김수영에 의해 여지없이 무시당했고, 경멸당했다.

박인환은 김수영을 친구로 생각했지만 김수영은 박인환을 친구로 여기지 않았던 듯 하다. 세상은 김수영과 박인환이 당대의 라이벌이었고 김수영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박인환이 도움을 준 것으로 인해 두 사람이 매우 친한 친구-비록 박인환이 두살 어리지만-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수영은 박인환과 친구인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인간적인 면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시세계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박인환이 주최하는 행사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심지어 그의 장례때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박인환의 묘에 김수영이 조용히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국문학에서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김수영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박인환은 구태여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호사가들이 1950년대 낭만의 거리 명동을 이야기할 때 박인환을 언급할 뿐이다. 그렇지만 박인환이 남긴 '목마와 숙녀', 얼굴 등은 낭랑한 목소리에 덧입혀져서, '세월이 가면'은 유행가 가사에 덧입혀져 감성충만한 10대 소녀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음직하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문학적 의미보다는 대중적 의미가 강하다고 할 것이다. 어쩌면 그는 1950년대 전쟁에 피폐해진 인간의 영혼에 한줄기 위로를 던지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한라의메아리----- > 오늘나의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담사  (0) 2018.09.03
백담사 오가는 길  (0) 2018.09.03
원대리 자작나무숲  (0) 2018.09.02
김유정  (0) 2018.09.02
구름의 향연 8/30  (0) 2018.09.0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