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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신천리를 가다 8/11

한라의메아리-----/오늘나의하루

by 자청비 2019. 8. 1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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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레끼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날씨가 엉망이다. 중국 쪽으로 가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우리나라로 왔으면 답사가 취소되어야 했을 것이다. 해마다 연례행사로 치르던 방송대 국문학과의 문학기행 행사가 이날 비날씨속에 진행됐다.  올해는 연이 닿아 성산읍 신천리 일대를 샅샅이 다니게 됐다. 신천리는 성산읍에서는 외곽이고 표선에는 포함되지 못해 제주도의 개발바람에 전혀 휩쓸리지 않은 소외지역이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에는 옛 풍습이나 문화가 많이 남아 있어 이런 쪽에서 많이 주목받고 있다.  답사길은 다음과 같다. 풍천초 옛터 - 천미연대 - 현씨일월당 - 신천리포구 - 돈짓당 - 고첫당 - 천미천 - 질진밭 곱은소 - 신천마장 - 신천신풍리경계석 - 용궁올레 - 칼선다리 - 고망난돌...


이날 답사는 신천리마을복지회관 바로 옆 옛 풍천조 옛 교사에서 시작됐다. 1970년에 이설됐으니 50년이 지나가는데도 옛 교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건물벽만 남아 있고 내부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그 때 당시 매각돼 학교부지가 모두 매각됐으나 마을 유지가 모두 인수해서 일부는 복지회관 터와 도로 등으로 기부하고 일부 남은 부지는 과수원으로 활용하면서 일부러 옛 교사도 헐지 않고 마을의 자산으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땅만 보면 개발이익만 떠올리는 시대에 남다른 귀감이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천미연대다. 해안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조선시대 때는 이지역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고 한다. 왜구들은 주로 바다에서 해적질을 하거나 해안가에 상륙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던 것이 두차례 내륙 깊숙이 침범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종 7년(1552)과 명종 9년(1554)에는 내륙 깊숙한 정의현청이 있는 곳까지 쳐들어 갈 정도로 크게 침범했다고 한다. 연대는 제주도 해안가 곳곳에 세워져 있다. 당시 왜구들이 침입이 얼마나 출몰했었는지 짐작케한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왜놈들이 하는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씨일월당이다. 원래 이 마을 현씨들만 기원하던 곳인데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마을본향당이 되었다. 옛날 1970, 80년대까지만 해도 미신타파 운운하면서 민속신앙을 일체 금한 적이 있다. 당시 도내 곳곳에 있던 많은 당이 사라졌으나 이 곳은 꿋꿋하게 버티고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곳의 오랜 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내륙(육지)의 무당들이 일부러 이 곳에 와서 기원한다고 한다.   



신천 마장굴 입구이다. 이 동굴 바로 앞에는 선시시대 집자리 유적이 확인됐다. 도로개설 작업중 유적이 확인되면서 발굴작업이 진행됐고 선시시대 집자리 유적이 확인되자 도로개설을 우회하는 방안이 제기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원래 계획대로 도로는 개설됐고, 동굴입구 앞 함몰부 일부가 도로 밑에 들어가 버렸다. 개발업자들의 이 무모함이 얼마나 많은 역사기록들을 지워버리고 있는 것인가. 



남해 용궁으로 들어가는 용궁올레와 출입을 금하는 칼이 거꾸로 박혀 있다는 칼선다리이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그리고 금덕이여(또는 금덕이초) 이야기도 들었다. 이제 그 자리는 국립해양조사원에 의해 해저분화구임이 확인돼 공모를 거쳐 탐라해저분화구로 이름지어졌다.



신천목장 바닷가에 광활하게 펼쳐진 잔디밭의 동쪽에 바다에서 솟아오른 듯한 바위 팔운석(일명 고망난 돌)이 있다. 이 팔운석은 옆에서 보면 구멍이 보이는데 돌 두개가 여덟 팔자로 맞닿아 있는 듯이 보여 오래전부터 팔운석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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