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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세기 '문지방 대담' 이어령교수 · 김규항씨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5. 7. 1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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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신문에 났던 글인데 좋아보여 블로그에 옮겨놓았습니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7일 오후 3시 이화여대 국제교육관 대회의실에서 42년의 강단생활을 마감하는 은퇴강연을 갖는다.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났다. 일 할 수 있을 때 은퇴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은퇴문화를 만들려한다' 는 게 우리사회에 문화적 상상력을 불어넣어온 대표적인 지성의 간명하면서도 단호한 변이다.

이를 계기로 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를 얘기해온 이교수와 21세기 새로운 세대를 대변하고 글을 써온 김규항씨가 20세기와 21세기의 '문지방' 에서 만났다.

이어령=한 개인을 통해 한 시대가 끝나가는 것을 조망하려 이 대담을 마련한 것으로 이해한다. 20세기와 21세기의 문지방에서 두사람이 공통점과 비판점을 찾아 이야기해 보면 은퇴하는 자리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내가 주로 질문을 해보겠다. 우선 소유의 관념이 세대간의 긴장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점이다. 젊은 사람들의 소유에 대한 의식은 어떠한가.

◇ 소유와 존재

김규항〓이중적이다. 우선 근대성을 확보했다는 면이 있다. 나의 주인은 나이지 국가나 민족, 혹은 어떤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극도로 강화됐다. 결국 주체적 의식이 강한 한편 구체적인 소유에서는 이기적인 면이 확장됐다.

이〓인터넷에서 무형의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유형의 소유 욕망보다 더 큰가.

김〓자신의 이해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철저히 구분된다. 이해가 걸리면 전 세대보다 더 이기적이다.

이〓아파트를 '장만했다' 고 말하는 과거 세대는 축적 가치를 사용 가치보다 우선시했다. 평생직장이 없는 새 세대에 그런 소유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1세기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그런가.

김〓소유에 대한 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다만 좋은 컴퓨터, 여가의 소유 등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 유형의 소유 대상 바뀌어

◇ 한국, 20세기와 21세기

김〓지난 세대 대부분의 사람은 가문.국가.집단과 자신을 동일시 했다. 21세기는 이에서 벗어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들이 심각한 이기심을 보이며, 과거 세대의 장점이 철저히 무너졌다. 인터넷상의 문화도 구체적인 자기 이해관계에 따르고 있다.

이〓카피 레프트 의식이 강한가.

김〓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건 아니다. 하고 싶으면 할 뿐, 전세대처럼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갖고 하는 건 아니다.

이〓그런면에서 접속이란 말이 이해된다. 예전에는 한 대의 전화로 가족 모두가 이용해 누가 누구에게 전화왔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지만 핸드폰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젊은 사람들에서 가장 기본 단위인 가족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혼도 급격히 늘고.

김〓가족구성원으로서의 가치가 무너진 것은 사실이며 아쉬운 일이다. 이혼 자체는 좋지 않지만 이혼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살아야만 하는 습속이 깨지는 것은 바람직하다.

이〓가족은 기본적으로 시장제도에 대한 반발이다. 아버지가 가족에게 구조조정과 퇴출을 명하지는 않는다. 가족이 시장을 보완하는 것이다. 문화.예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21세기에서는 가족.문화.예술도 시장화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다. 또 예전에는 대학도 총장은 어머니고 학생은 딸.사위라 했다. 요즘은 총장은 CEO, 교수는 사원, 학생은 소비자가 됐다. 모르는 사이에 가족패러다임이 시장패러다임이 됐다.

김〓가족 단위의 이기심이 극단화하는 것도 문제다. 내 새끼, 내 가족만 챙기는 자본주의적 이기심 말이다. 대학이 이제는 말을 꺼내기조차도 민망한 단어인 진리 탐구보다는 사회 진출의 도구, 효율.돈 등 자본주의 질서에서 유능한 인재 만들기의 무한 경쟁터로 변했다.

◇ 21세기의 코리안 드림

이〓지금까지 코리안 드림은 좋은 대학과 유학, 넓은 아파트였다. 새로운 의미의 코리안 드림은 없을까.

김〓이전의 코리안 드림은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와 병행하는 것이었다. 참고 졸라매고 저축하면 밝은 미래가 열린다는. 지금 세대는 현재의 욕망에 충실하다. 물론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해리 포터 시리즈가 많이 읽히고, 마리오 게임 등 비현실적인 환상 게임이 유행한다. 혹시 대신할 만한 가치가 없는 현실이 그런 원인이 되지는 않나.

김〓역시 탈현실에 근본 원인이 있다. 소위 386세대까지만 해도 어떤 책을 읽고 감동하면 현실에서 그걸 실천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새 세대의 문화는 철저히 탈현실적이어서 실제 삶에 연결되는 일이 매우 적다.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이〓인터넷상의 인격과 현실 세계의 인격 분화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연극적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온라인의 삶과 오프라인의 삶 가운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는가.

김〓아직 혼재된 상태다.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아주 어린 사람들이 현실의 고스톱을 즐겁게 하는 것을 본다. 지금 젊은 세대는 온라인의 가치가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걸 즐기는 것이다.

이〓내가 20대에 등단할 당시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한다는 명제가 가장 중요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 는 식의 존재규정에 대한 반발이 나의 글쓰기의 주요 모티브였다. 그런데 21세기의 젊은이들은 그런 문제를 관념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체험적으로 파악하는 듯 하다. 내 손자가 하루는 "어떤 미친 놈이 매일 가야하는 학교라는 악마의 성을 만들었느냐" 고 하더라. 나는 학교가 있으니 당연히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상적 충격이 관념의 소산이었던 나의 과거 글쓰기를 되돌아보게 한다.

*** 문화.예술도 시장화 우려

◇ 이타적 인간, 이기적 인간

이〓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이타적 요소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이타성에 기반한 공유의 세계는 없을까. 우리의 공동체는 구성원들을 앞으로 무엇으로 엮을 것인가.

김〓요즘 젊은 이들에게는 이미 정해진 것, 당연한 것은 없다. 국가도 의문의 대상이 된다. 가족과 학교는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우려할 만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적절한 조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 이기심과 이기심이 계속 부딪칠 때, 결국 이타적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80년대는 세계사에서도 독특한 것이다. 진보적 인텔리들이 그렇게 대규모로 출현한 적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90년대들어 돌변해 그 다음 세대가 최소한의 사회의식을 갖기 힘들게 됐다. 그러나 역사에서 10년은 매우 짧다.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이〓한국의 80년대는 확실한 자기 언급의 시대였다. 반면 90년대 이후 많은 이들이 분명하게 자기 주장을 하지 않다. 채팅할 때 의문문을 많이 쓴다. 모든 말의 끝을 올린다. 이런 현상은 불확실한 자아를 계속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김〓그런 문투는 한국적 특징이라고 본다. 한국에서 특히 인터넷 게시판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공적 커뮤니케이션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단언과 주장을 싫어하는 게 요즘 세대다.

이〓80년대 대자보 문화와 달리 인터넷 게시판 문화는 공적이지만 동시에 개인적이다. 큰 흐름이 자잘한 논쟁에 묻혀간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 안온한 삶에 딴지를 거는 등에와 같은 존재였다.

김〓인터넷 게시판에서 보여지는 열정에 비해 질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보인다. 익명성은 민주적 가능성과 폭력적 가능성을 동시에 가진다. 인터넷의 열기는 높지만 결국 헤게모니는 그 매체를 통제하는 오프라인의 집단에 있다.

이〓옛날의 사발통문은 주동자를 알 수 없게 해 집단 속의 익명성이 보장됐다. 그런 봉건적인 오랜 습관이 자아와 근대성이 구현됐다는 인터넷 게시판 등에 저변으로 작용한 것 아닌가. 한국인의 스타일이 흘러가고 있다. 시대의 변화가 원초적으로 보여지는 게 성과 섹스의 문제다. 트랜스 젠더가 그 극단적 표현이다.

*** 온.오프라인 삶 조화 필요

◇ 21세기의 성(性),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김〓젊은 세대는 계율에 자기를 복속시키기지 않는다. 싫으면 안하고 좋으면 한다는 행동 양식은 위선적이지 않다. 언제나 현 세대의 성의식은 지난 세대보다 진보적이게 마련이다.

이〓신라 시대 박제상의 부인을 보라. 일본으로 가려는 남편을 말을 타고 달려가 붙잡는다. 한동안 유교적 가부장제에 짓눌려왔던 이런 적극적인 여성상이 이제 다시 나타나는 것 아닐까. 어떤 면에서 여성들의 힘은 인류가 꺼내들 수 있는 비장의 카드다. 한국은 특히 그렇다.

김〓성 스타일의 변화는 실은 여성의 문제다. 여성의 성적 자유가 진전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예컨대 연예인의 사생활 비디오를 보는 시각도 짧은 시간 안에 급격히 변하는 것을 본다.

이〓개인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공적인 공간으로 튀어나오는 문제를 어떻게 봐야하나.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사용하거나 화장을 고치는 사람으로 인해 지하철은 사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김〓공적 공간이 무시되는 것은 사적 공간이 보장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특징에 크게 기인한다. 대표적인 공간이 러브 호텔이다. 엄청난 수의 여성이 직간접적으로 매매춘에 종사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지나칠 정도로 엄숙한 게 우리 성문화의 모순이다.

◇ 글과 말, 21세기의 매체

이〓조지오웰의 『1984』가 역으로 적용되고 있다. 백악관의 정보를 모든 국민이 보고, 기업의 회계정보가 투명화된다. 문맹이 없어짐으로써 권력의 전횡을 막을 수 있었듯, 미디어의 확산이 특권을 해체시킬 수 있다면 미디어를 이용해 빅브라더의 전횡을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다.

김〓TV와 달리 인터넷은 쌍방향적이며 민주적 속성을 가지지만 그 자체가 진보적인 건 아니다. 자본과 권력에게 역시 전례없는 무기이며 누구에게 사용될 것인가는 남겨진 숙제다. 이어령 선생의 특징은 문명적 통찰에 있다. 그러나 문명비판이 늘 중립적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비판적이다. 우리사회에 원로가 부족하다고 한다. 혼탁한 현실속의 젊은이들에게 분명한 분별을 제시하는 분들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권위있는 어른이 분명한 말을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만약 내가 역사를 소유의 언어로 봤다면 법률가나 정치가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언어를 우선시했기에 문학을 했다. 나는 소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급변의 역사적 현장에서 솔로보다 에머슨에 가까운 사람으로 살고 있다. 21세기의 많은 젊은 지성들이 소유와 존재의 갈등을 잘 설명해주길 바란다. 특히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결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앙일보 2001-09-05]Posted by gyuhang at 2004.06.04 01:22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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