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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5. 7. 2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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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곡의 삶을 잊고 부디 편히 잠드시길….’>
지난 16일 숨을 거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의 영결식과 노제가 24일 오전 10시 서울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열렸다. 영친왕(고종황제 아들) 이은의 왕세자였던 이씨의 영결식과 노제가 진행되는 동안 각계 인사와 시민 등 수천명의 인파가 몰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며 왕실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식장에는 이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관광객 등 2000여명이 몰려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씨의 전 부인 줄리아 멀록 여사는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고 영결식 뒤 열린 노제만 지켜봤다. 영결식은 운구 운반과 개식 선언, 묵념, 고인의 약력보고, 조사 낭독, 유족과 조문객 분향 등 순으로 진행됐다. 고인의 운구는 낙선재 빈소에서 이원씨와 고인의 조카인 가수 이석(의친왕 아들)씨 등 유족이 뒤따르는 가운데 국방부 의장대에 의해 검은색 캐딜락 승용차로 옮겨졌다.

 

이 총리는 조사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고 이구 저하의 훙서(薨逝·임금 등 귀인의 죽음을 높이는 말)를 진심으로 애도하오며 영령께서 사랑하시는 부왕(영친왕)과 모후(이방자)를 만나 현세에서 다하지 못한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시기를 삼가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관계자 등 600여명이 뒤따르는 가운데 운구가 종로 3가를 거쳐 종묘 앞에 도착하자 제사 순서를 알리는 집례(執禮)로 노제는 시작됐다. 노제를 마친 운구는 오후 2시쯤 장지인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영친왕 묘역인 영원(英園)에 안장됐다.

 


 

*<마지막 황세자의 비극적 삶>
마지막 황세자 이구씨가 지난 16일 일본 도쿄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로써 조선 왕실의 마지막 적통이 완전히 끊겼다. 이 호텔은 바로 74년 전 그가 태어난 왕가 저택이 있던 곳이다. 평생을 떠돌며 살더니 끝내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숨진 것이다. 이구씨의 아버지 영친왕 이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고종과 엄비 사이에서 태어난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며 순종의 배다른 동생이다. 그는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되자마자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은에겐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두 사람을 파혼하게 하고 이은과 마사코를 1920년 결혼시켰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던 이방자(李方子)여사의 본명은 나시모토 마사코였다. 일본 왕족 집안에서 태어난 마사코는 히로히토가 왕세자 시절 혼담이 오가던 3명의 세자비 후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건강 진단 결과 마사코가 불임의 가능성이 짙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 대신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황태자 이은(李垠)과 정략결혼시켰다. 양국 왕실 간 유대를 튼튼히 한다는 전시효과와 함께 마사코를 통해 조선왕실의 대를 끊어놓겠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영친왕과 이방자여사는 결혼 이듬해 첫아들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이 아들은 영친왕 부부의 서울 나들이 길에 함께 했다가 급성 병으로 생후 8개월 만에 죽었다. 이 후 10년동안 임신과 유산이 이어지다가 1931년 꿈에 그리던 아기를 얻게 된 이방자 여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아,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던가. 조선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이 아이가 굳건히 조국 땅에 서기를…” 그리고 이름을 구(玖)라고 지었다.


그러나 망한 왕조의 마지막 황세손(皇世孫)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보다는 좌절과 실의의 나날들이었다. 이구씨의 인생은 어머니의 소망처럼 순조롭지 못했다.  마지막 황세손이라고 하지만 나라를 빼앗겨 이름만 남은 왕실의 후손인데다 어머니 이방자 여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는 시선도 그를 괴롭혔다.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조선왕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궁궐을 비롯한 옛 왕실 재산은 모두 국가소유가 됐다. 이구씨는 미국 MIT대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아버지의 환국(還國)과 함께 1963년 고국에 돌아왔으나 1977년 사업이 부도가 나자 도망가듯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결혼생활도 순탄치 못해 1958년 독일계 미국 여성인 줄리아씨와 결혼했으나 종친들의 종용으로 이혼해, 대를 이을 후손도 없었다.


고인은 일본 도쿄에 거주하다가 96년 11월 다시 귀국, 기자회견을 통해 “내 귀국은 아버지 영친왕이 1907년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뒤 90년 간 지속돼온 한.일간 통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조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외면당한 그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은 채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조선왕실의 마지막 가계도>
조선왕조를 이은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가짐으로써 성립됐으나 일제의 강요에 의해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이 1910년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왕가(王家)는 그 뒤로도 존속해 영친왕이 순종을 계승했고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 씨는 황세손으로 불리었다. 이구씨는 고종황제의 손자인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高宗)(1852-1919)은 모두 9남 4녀를 두었다. 이중 결혼한 아들은 명성황후 민씨 사이에서 낳은 2남 순종(純宗) 척(拓·1874-1926)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낳은 6남 의친왕(義親王) 강(堈·1877-1955), 그리고 계비인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낳은 7남 영친왕(英親王) 은(垠·1897-1970) 등 세 명뿐이다.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영친왕 이은씨가 형 순종이 즉위한 1907년 황태자가 된다. 이복 형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가 된 것은 그의 모친 순헌황귀비가 명성황후 사후 비 중에서 최고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한 뒤 영친왕은 ’이왕(李王)’으로 불리었다. 마지막 황세자인 이구 씨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영친왕의 첫째 아들 진(晋)은 생후 8개월 만에 서울 나들이길에 급성 병으로 숨져 이구씨가 사실상 마지막 황세손이 됐다.


한편 의친왕은 모두 13남 9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국에 살고 있는 9남 충길(忠吉) 씨가 생존자 중 가장 연장자로 ’우리황실사랑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비둘기집’으로 유명한 가수 이석(李錫) 씨는 의친왕의 11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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