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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대학살의 역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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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청비 2005. 11. 3.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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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대학살

 

지난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대학살 90주년 행사.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이 대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AFP 연합)

 

아르메니아 민족은 노아의 방주 신화로 유명한 지금의 터키 동부 지역의 아라랏산 근방에 거주하면서 고도의 문명생활을 누려왔다. 301년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주위의 국가들이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도 개종을 거부해 나중에는 근방에서는 아르메니아 민족만이 기독교 민족으로 남았다. 바로 이 때문에 기회만 생기면 아르메니아를 이슬람 국가로 개종하기 위한 이슬람 제국들의 침략이 이어졌다. 15세기부터 오토만 제국이 중동과 발칸 전 지역을 정복하면서 아르메니아도 오토만 제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 1915년 오토만 제국은 누구나 치를 떠는 잔인한 방법으로 150~2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전체 300만 아르메니아인의 2/3에 해당하는 인구였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벌어지기 전 오토만 제국(지금의 터키)에는 약 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었다. 1915년에 터키 정부가 수립한 정책에 따라 이뤄진 대학살로 150만~2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 중 거의 2/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인종 대청소’가 자행된 것이다. 당시 터키 정부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아르메니아 민족을 학살했다.

 

1915년 4월24일, 터키군은 325명의 아르메니아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대학살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다. 이후 계속적으로 아르메니아 남자들이 학살됐다. 당시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학살하기 위해 18살 이상 50살 이하의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모두 군대로 소집했다. 강제징집된 아르메니아 남자들은 터키군에서 얼마간 훈련을 받다 나중에는 모두 무장해제된 뒤 50명에서 100명 단위의 그룹으로 나뉘어 다리 건설과 도로공사 현장에 동원됐다. 얼마 뒤 이들은 모두 집단적으로 공사장에서 터키군에게 학살됐다. 이런 식으로 수십만명의 아르메니아 남자들이 터키군에 끌려가서 죽어갔다.

 

남자들에 이어 남아 있던 어린이들과 부녀자들, 노인들은 모두 사막으로 강제 추방돼 굶주림과 갈증, 학살로 죽어갔다. 35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시리아의 사막으로 추방했는데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단지 35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러한 대학살로 인해 아르메니아 민족의 운명은 완전히 변하게 됐다. 고대 시대부터 살아온 땅과 가족과 재산을 잃고 전세계로 흩어지게 됐다. 현재 러시아에 200만명, 미국에 100만명을 비롯해 107개국에 모두 900만명의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 추모단의 가운데에는 학살당한 영혼을 위로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소비에트 시절 금기시된 이슈였다. 소비에트 초창기부터 크렘린 당국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반소비에트적 민족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얘기하는 지식인들은 가차없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자로 몰아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했다. 이런 식으로 스탈린이 권좌에 있는 동안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처절한 침묵이 강요됐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들어선 뒤 쌓였던 아르메니아 민족의 한은 결국 폭발하게 된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50주년을 맞은 1965년 4월24일,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20만명의 시민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인정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당시 소비에트연방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시위로 소비에트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크렘린 당국에서는 이 시위를 반소비에트 시위로 몰아 시위 군중들에 발포를 명령했으나 예레반 정부의 수반은 크렘린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물론 예레반 정부의 수반이 명령 거부로 사퇴하긴 했지만 이때부터 크렘린 당국도 아르메니아 대학살 문제에는 간섭하기를 포기했고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한 공론화는 가속적으로 추진됐다. 추모 행사가 열렸고 추모탑과 추모단이 설치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예레반의 러시아-아르메니아대학의 국제관계학연구소장인 로잘리 가브리엘리안(61) 교수는 오토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1915년이 아닌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1893년에서 1896년까지 이미 수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오토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 없는 아르메니아’나 ‘터키인만을 위한 터키’라는 기치를 내걸고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대학살을 구체화시켰다는 것이다. 로잘리 교수는 “1915년 터키군에 의한 대학살이 시작되면서 6개월 만에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는 국가가 치밀하게 주도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터키의 국가적 범죄임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터키 정부는 단 한번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도리어 대학살을 제기하는 아르메니아에 대해 완전한 국교 단절과 국경 봉쇄, 금수 조치를 통해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또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외교적 보복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는 이웃 국가들로부터 고립되면서 경제적으로 엄청난 곤란을 당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민족이 무엇보다도 터키 정부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한 가지 극단적인 역사 왜곡의 예를 든다면, 아르메니아 민족을 대학살의 가해자로 터키 민족을 대학살의 피해자로 만들어놓은 적반하장 격의 역사 왜곡이다. 그동안 터키 정부는 3천만달러 이상의 예산을 지출하면서 주로 미국 대학의 역사학자들을 매수해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혼신을 기울여왔다.

 

독일의 나치가 2차 대전 중 치밀한 계획하에 유대민족에 대한 말살을 시도한 역사는 잘 알려졌으나, 이보다 앞선 1915년에 터키가 자행한 아르메니아 민족 대학살은 인류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 “지금 누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기억하는가?”라는 주장을 펴면서 유대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역으로 말하면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일어났을 당시 이 사건이 세계적인 문제로 도마 위에 올랐더라면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에도 강대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완전히 무시당해왔다. 지난 2000년 4월,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미국 내의 아르메니아인 사회를 중심으로 공론화가 진행되어 미국 의회의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터키의 압력을 받은 미국 정부는 하원에 권고해 안건의 심의를 중단시켜 세계 여론의 질타를 받은 일도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세계는 지금도 90년 전에 학살당한 아르메니아 민족을 다시 한번 학살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학살자인 터키와의 군사적·경제적 이해관계가 훼손될 것이 두려워 학살자의 편에 서서 학살자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게 서글픈 국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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