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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효고(兵庫)현 니시노미야시(西宮市) 소재 고요엔(甲陽園) 지하호
점심식사후 효고현으로 이동했다. 효고현에서
재일동포인 서원수(81 徐元洙 갑양원지하호보존회)옹을 만났다. 서 옹과 함께 우리를 안내해줄 일본인 오호츠키 요시코(64 大月良子
前니시노미아시의원 3선, 〃)씨도 동행했다. 또 마이니치 등 일본신문의 기자들도 4명이나 함께 했다.
고요엔 지하호는 지난해 8월부터
관람이 통제되고 있다고 했다. 국가적으로는 한일문제, 북일 국교정상화 문제 등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사사로이는 이 지역이
오사카의 내로라하는 부유층들이 모여사는 동네인데 고요엔 지하호는 동네 한복판의 개인 집을 통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이 이 지하호를
보기 위해 낯선 사람들이 동네에서 어정거리는 것에 대한 주민민원도 있는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지하호는 일본내 존재하는 수 천 개의
지하호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국 독립’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더욱 의미를 남기고 있다. 게다가 보통 지하호들이 군사작전을 위한 진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 지하호는 항공기제작을 위한 지하공장 시설이라는 점에서도 눈여겨 볼 만했다.
어쨌거나 당초 이 지하호는 우리 일행이 볼
수 있도록 허가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한국정부 진상규명위원회가 온다고 하자 마지못해 허가를 내줬다는 후문이다. 지난 4월 한국정부의
진상규명위원회가 왔을 때도 이 지하호는 보지 못하고 서원수 옹만 만나고 귀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원수 옹이 일행들을 모아놓고 설명하는
동안 낯선 사람 네 명이 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 본 즉 니시노미아시의 관계자들이었다. 집주인의 양해를 얻어 대문안으로 들어간 뒤 집
오른쪽 모퉁이로 돌아 집과 담사이 통로가 불과 30cm정도에 불과한 비좁은 통로를 지나 집 뒤로 이르니 철문이 놓여 있다.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폭 2m, 높이 2.5m 규모의 시멘트를 바른 돔형 지하호가 나타났다.
20m정도 들어가니 경비실이 나타났다. 그 뒤로
시멘트벽이다. 뒤로 다른 지하호가 연결됐으나 시멘트벽으로 막아놓았다. 얼마를 더 가니 또 다른 터널과 이어진다. 이 터널도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오른쪽 벽에 이제는 많이 지워져 버린 ‘조선국 독립‘이라는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이 곳에서 안내를 하던 서 옹은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조선국 독립'을 읽어내렸다. “당시 이 글을 쓸 때 그 조선인 강제연행자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온다.
지하호
입구에서 70m쯤 들어가니 시멘트 터널은 끝이 나고 바닥엔 시멘트가 돼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굴착상태 그대로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좌우 폭과
높이가 3~4m는 족히 되 보였다. 벽과 천정에는 굴착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천정 곳곳에서 물이 떨어져 지하호 한쪽에는 마치 호수를
이루듯 물바다를 이뤄 이동이 불편했다.
이 지하호의 전체모습도 마츠시로 대본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하호가 가로, 세로로 바둑판처럼 연결지어져 갔다. 미공개구간은 돌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이 지하호는 항공기부품 공작창으로 사용하려던 곳이라서 매우 규모가 크다. 폭이나 높이 등이 마츠시로 대본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크고 넓었다.
종전후 베일에 가려졌던 이 지하호는 1987년쯤 니시노미아시가 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산을 깎으면서
드러났다. 조사결과 이 지하호는 ‘가와니시(川西) 항공기‘ 회사의 지하공장 시설로 밝혀졌다.
이 지하공장 건설은 1945년 3월 오사카
해군시설부가 5개의 민간건설회사에 맡겨 시작됐다. 이 곳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최소 5백명에서 최대 2천명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체로 암반으로 형성돼 있어서 발파작업이 많았다. 발파작업하면서 조선인 노무자가 4명이 숨져 인근 사찰에 모셔져 있다고 했다. 이 지하호의
입구는 모두 7개나 되는데 우리 일행이 들어온 곳을 제외하고는 택지공사를 벌이면서 모두 막아버렸다고 한다.
서 옹이 조선인 강제연행자의
애환을 설명할 때 유심히 설명을 듣던 낯선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이 곳을 들어올 때 일본의 신문기자와 니시노미아시 관계자들도 함께 들어왔기
때문에 일본 신문기자거나 시 관계자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지하호에서 나오고 보니 재일동포 3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할아버지의 고향이
북제주군 한림이라고 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무작정 찾아와 함께 이 지하호를 견학했다는 것이다. 이 아가씨는 다니던 직장도 이미 그만뒀고
앞으로 재일동포의 권리를 찾는 일에 뛰어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견학이 끝난 뒤 니시노미아시 정보공개실 요네다 계장은 우리 차에
올라와 인사말을 겸해 “일반인에게는 미공개하고 있지만 이번에 정부관계자가 온다고 해서 특별히 공개했다고 밝히고 귀중한 시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처 이름을 확인하지 못한 니시노미아시의 도시계획과 부장은 ”이번에 고요엔 지하호를 처음 둘러보게 됐는데 서선생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설명 덕분에 한일간 아픈 과거를 알게 됐다“고 밝혔다.
지하호에서 나온 뒤 동네 작은 공원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암벽
한복판에 시멘트 흔적이 보였다. 고요엔 지하호의 입구였는데 시멘트로 막아놓았다고 한다. 지하호는 입구가 모두 5개였는데 지금은 우리가 들어갔던
한 곳을 제외하고 모두 막아버렸다. 동네 한복판의 작은 공원은 택지기반 공사중 고요엔 지하호가 드러나자 메워서 만든 곳이다. 시가 택지로
활용하려던 것을 보존회가 극력 반발하는 바람에 작은 공원으로 조성됐다.
서 옹과 함께 고요엔 지하호를 안내했던 일본인 오호츠키 요시코씨는
“고요엔 지하호가 일반과 학생들에게 공개돼 전쟁의 참상을 되새기고 평화에 대해 생각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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