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동안 오키나와(沖繩) 전적지를 둘러보았다. 오키나와는 정말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오키나와가 제주도와
여러모로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목적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남았다. 그러나 공항에서
부터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으며 오키나와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이 곳 오키나와 전적지를 둘러보면서 최근 일본의 보수우경화
성향을 새삼 느껴야 했다. 오키나와 첫날 우리를 안내하기로 했던 이 지역 대학교수가 몸이 아파 나오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채 우리
일행중 예전에 오키나와를 몇차례 방문했던 제주대 조성윤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전적지를 둘러보았다. 이날 우리 일행은 새벽부터 움직이기 시작해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에 도착한 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일 해군사령부 지하호로 이동했다.
①일 해군사령부 지하호
오키나와에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이 나하(那覇)시에 소재한 일 해군사령부 지하호였다. 오오타 미노루
사령관이 참모들과 함께 자결한 곳이다. 본토의 지하호 대부분이 미처 완공되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한 반면 이곳 지하호는 깔끔하게 완공된 데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의 해군사령부로 사용됐던 곳이다. 입구에는 전시관을 마련해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과 전황 등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당시 군병력 및 무기현황 등을 상세히 비교해 보여주고, 사진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처참한 모습 등을 주로 부각시켰다. 열악한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본군이 얼마나 애썼고 미군들이 주민들을 얼마나 학살했는지를 강조하는 듯 했다.
전시관을 지나 지하호 입구에
다다르니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 끝에서 보았던 종이학 꾸러미가 늘어서 있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立正?成會‘였다. 이 단체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보수우익 종교단체라고 한다.
<해군사령부 지하호 입구에는 우익단체들의 평화를 기원하는 종이학 꾸러미가 걸려 있다.>
계단을 따라 30여m쯤 내려가니 긴 복도가 나오고 가로질러 작전실, 막료실을 거쳐 사령관실로 이어졌다. 사령관실에는 나무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고 한쪽 구석에는 혼을 달래는 듯한 향로가 놓여 있다. 그러나 벽면에는 치크베 리메츠(醜米覆滅 추악한 미국을 뒤집어 멸하자)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해군사령관실.안쪽벽면에 미군을 멸하자는 글이 새겨있다.>
이어 암호실을 지나 의료실, 발전실, 하사관실 등을 거쳐 반대편 출구쪽으로 향했다. 산으로 나있는 출구는 병사들이 출동하는 문이었으나 지금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
<일 병사들이 출동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출구>
당시 이 출구를 통해 출동했던 병사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양 옆에는 미공개된 지하굴이 있는데 병사(兵舍)나 관련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하호의 공개구간은 300m이고 미공개 구간은 150m에 이른다. 미공개 구간은 상당부분 허물어져 흙더미가 쌓여 있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아래 사진>
②피로 물든 언덕 가가쓰고지(嘉數高地)
기노완시에 들어가면 시 중심에 미해병대의 항공기지가 있다. 그 남쪽으로 조그만 언덕이 2개가
겹쳐져 있다. 이 지역은 워낙 평지인 탓에 이 두 개 언덕은 해발 1백여m에 불과하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앞쪽에 있는
것이 가가쓰고지, 뒤쪽에 있는 것이 마에다고지(前田高地)이다.
여기서 미군과 일본군은 오키나와戰 초기 최대규모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4월 8일 미군은 이 구릉지대를 공격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2주 이상 계속됐다. 가가쓰고지가 함락된 다음에는 마에다고지로 이동됐다. 양측의
거리가 직선거리로 불과 10km에 불과하지만 이 전투에서 오키나와 작전의 절반인 50일을 소비하고 일본군 전사상자가 6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치열했다.
당시 가가쓰고지는 지금은 공원으로 정비됐다. 정상의 전망대에 올라서면 미군이 상륙했던 요미탄, 가데나의 해안부터 중부전선의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발 밑에는 일본의 토치카 잔해가 남아 있다.<아래 사진>
<토치카 안으로 들어가면 시내가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언덕에는 3개의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청구의탑(靑丘之塔)’이다. 우리나라에서 강제연행돼 이 곳에서 탄약운반과 진지구축 작업 등에 동원됐다가 전사한 조선인 군인 및 군속을 위한 위령탑이다. 이 탑은 우리 정부 또는 한인이 세웠을까? 아니었다. 1971년 일본민주동지회 松本明重이 세웠다. 탑의 내용을 보면 “한민족 출신 군인 군속 386주가 이곳에서 산화했다……(중략)……오키나와현의 협력을 받아 이 탑을 세워 英勳을 찬공한다고 돼 있다. 그들이 말하는 ‘영훈’이란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옆에 다소 작은 비(碑)가 하나 더 있었다. 앞 면에는 ”이 탑에 잠든 사람들은 먼나라에 와서 이 곳에서 혼이 되었다”고 씌여 있다. 뒷면에는 ‘世界救世敎’ 등 20여개의 단체들이 나열돼 있다. ‘세계구세교’는 일본의 황족들이 믿는 종교라고 한다. 이밖에 여기에 나열된 단체들은 모두 日 황족과 관련된 단체들이었다. 일 황족 관련단체들이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이국 땅에서 숨진 조선인들을 위해 이같은 탑을 세웠을까?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조선인 강제연행자의 위령탑>
두 번째 보이는 탑이 '가가쓰의 탑(嘉數之塔)‘이다. 이 탑은 오키나와 지역주민들을 위해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경도의탑(京都之塔)‘이다. 이 탑은 앞선 두 개의 탑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넓은 공간에 화려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싸웠던 일본군에
교토 출신자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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