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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요미탄촌 도구치(渡具知) 해안 특공기지
가가쓰고지에 내려온 일행은 미군 군함을 공격하기 위한 인간어뢰용 기지인 특공기지를 찾아보기로
하고 요미탄촌으로 향했다. 요미탄촌은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도구치 마을에 도착했으나 인적이 드물었다. 차로
이리저리 이동하던 중 운좋게 주민 오안노리코씨(69 大?統仔)를 만날 수 있었고 이 분의 도움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오안노리코씨가 안내한 곳에 또 한 분의 지역민인 히루가 미노루(67 比嘉稔)를 만나 특공기지 4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河口 北岸에 위치한 이 기지에는 마침 지역주민들이 사용하는 작은 배를 갖다놓아 당시 모습을 재현해 놓은 듯 했다. 굴의 길이는 30여m 높이 2m 폭 3~4m로 입구는 수면을 향해 있다. 예전에는 굴에서 수면까지 레일이 깔리고 굴 속에는 마무레라는 암호명을 가진 특공정이 있었다고 한다. 마루레는 길이 5.6m, 무게 1톤, 합판으로 제작한 엔진이 붙어 있는 보트로 폭뢰를 탑재해 특공대원 1명이 20노트의 속력으로 돌진해 적함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45년 3월 29일 심야에 17척의 특공정이 게라마에 집결하고 있던 미 함대를 목표로 출격했으나 전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④치비치리가마(自決壕)
날씨가 저물어 당초 계획했던 치비치리가마(自決壕) 방문은 자료로 대신했다. 요미탄촌 나미히라 남서쪽에 위치한 치비치리가마는 미군 상륙지점 해안으로부터 약 1km 떨어진 계곡 밑에 숨은 조그만 피난호였다. 이 가마에는 오키나와 주민 140여명이 피난해 있었다. 4월 1일 미군이 상륙한 이후 이 가마는 미군 전차와 무장병에 포위됐다. 4월 2일 남자들은 미군의 투항권고를 거부하고 죽창으로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미군의 수류탄과 기관총 공격에 굴속은 공황상태가 됐다. 다음날 미군이 동굴 안으로 진입하자 동굴에 있던 어린 여학생이 자신을 죽여달라고 칼을 내밀었고 엄마는 딸이 빨간 귀신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칼로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서로 죽이며 자결을 시도했다. 미군이 동굴을 완전 진압하는 2시간동안 굴 안에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주민 85명이 완전히 죽었고 이 가운데 어린이가 47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치비치리가마의 비극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가 1983년 여름 일본의 한 아동문학작가가 지역청년들과 공동조사하면서 비로소 전모가 드러났다. 지역주민들은 이 동굴을 정비하고 입구에는 평화기원을 담은 ‘평화의 상’을 세우고 공개했다. 그러나 이 상은 1987년 일본의 우익단체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당시 오키나와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씨가 오키나와에서 처음 열린 국민체육대회(우리나라의 전국체전) 경기장에 게양된 일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장기를 불에 태워 버린데 대한 보복이었다. 치바나씨는 그 일로 인해 우익단체들의 방화로 슈퍼마켓이 불에 탔고 여러 달 동안 살해협박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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