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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한국인 위령비
<반원형의 석총으로 만들어진 한국인 위령비>
평화공원 입구 맞은 편에 구(球)를 잘라 엎어놓은 듯한 석총이 있다. 1975년 8월 건립위원회의 손으로 세워진 ‘한국인
위령탑’이다. 석총의 주변에는 우리나라 각 도에서 모아온 돌이 박혀 있다. 이 탑이 만들어진 계기도 매우 부자연스럽다. 1970년대 들어
오키나와에서 위령탑 건립이 활발해졌지만 한국인 징용자를 위한 위령탑은 전혀 세워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일본인-오키나와전 당시 한국인
징용자들과 교분이 많았다고 함-이 한국인 위령탑을 건립하기 위해 1973년부터 민간모금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을 재일동포 단체인
민단이 알고 건립위원회를 구성, 자체 모금과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1975년 8월 건립하게 된 것이다.
입구에 세워진 위령비에는 노산
이은상이 쓴 ‘영령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한글로 새겨wu 있다. 그러나 한국인 위령탑은 그저 오키나와에 들렀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잠깐 들렀다
가는 장소로만 이용되고 있을 뿐 건립이후 이곳에서 단 한차례도 위령 행사를 개최한다든지 기념행사를 마련한다든지 하는 일체의 행사가 없어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④만개노도(萬華之塔)
현재 오키나와현 남부에 위치한 이토만시는 오키나와전 최후의 격전지였다. 이 지역민들이 전쟁이 끝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부근의 밭과 산야, 동굴 등에 흩어져 있는 유골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이 곳에는 마을마다 1기 이상의 납골당을 갖춘 위령탑이
있다. 이 중에서도 마카베촌의 만개노도(萬華之塔)는 큰 규모이다. 불럭을 쌓아 창고처럼 지은 납골당에는 1만9천여 기의 유골이 있다. 당
위에 비를 만들어 탑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당초 사각형의 창고같은 납골소만 있었으나 나중에 주변에 각종 현창비가 들어섰다.>
주변에 ‘砲兵山吹之塔‘이라는 현창비(顯彰碑)를 비롯한 갖가지 종류의 부대별 위령비 수십기가 세워져 있다. 만개노도 앞에도 포탄을
세워놓고 있다. ’야전중포병제1연대회’가 세운 이 현창비에는 다소 내용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皇軍으로서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를 내세우고
있다. ‘忠靈’이라는 제목으로 明治天皇의 和歌를 새기고 연대의 전력을 칭송하는 비문도 있다. 이 비문은 일본군이 ‘勇戰敢鬪‘를 기리는 내용으로
돼 있다. ’八紘一宇의 碑’도 있다. ‘八紘一宇‘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념을 보여주는 말이다.
주민들이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들을 모아
위령하는 곳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용맹성을 자랑하는 현창비 수십기가 세워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는 전쟁희생자의 영혼을 모욕하고
현민의 감정을 짓밟는 행위이지만 오키나와가 미군에서 일본으로 반환된 이후 오키나와 戰跡은 급속하게 일본식 국수주의로 도배되고 있는
현장이다.
⑤샌닌호(千人壕)
위령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샌닌호(千人壕)가 있다. 당초 이곳엔 주민들이 피해 있었으나 오키나와전이 끝날
무렵 미군에 쫓긴 일본군이 이 동굴로 피신해오면서 일본군의 잔학성이 드러난 곳이다.
<오키나와 입구 단장된 연못. 이곳에서 어린아이 유골이 많이 나왔다>
<완전 정비되지 않아 60여년전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노인과 여성, 어린이들, 부상당해 움직일 수 없는 병사들은 입구 가까운 곳으로 내몰렸고 건강한 병사들은 보다 안전한 깊숙한 장소를
차지했다. 어린아이들이 울면 적에게 발견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목을 졸라 죽였다. 입구 근처로 내몰린 주민과 부상병은 미군의 포격에
숨졌다.
우리 일행은 샌닌호에 들어갔다. 동굴은 꽤 컸으나 주변이 바위로 이뤄져 걸어갈 수 있는 공간은 협소했다. 동굴 입구에 가로 세로
각 2m정도의 물통이 있다. 지금은 시멘트로 단장했지만 당시에는 커다란 연못이었다. 종전후 이 연못에서 어린아이들의 시신이 매우 많이 나왔다고
했다. 동굴 속에서 우는 아이들은 모두 이 연못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연못을 지나 조금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좌우 양옆이 험한
관계로 가운데 좁은 수로를 따라 들어갔다. 1백여m 채가지 않아 호사카 교수가 동굴벽면 바위 위 진흙이 쌓여 있는 비교적 평평한 곳을 가리키며
“저 곳을 파보면 지금도 유골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샌닌호는 전혀 정비가 안된 관계로 길이 매우 험했다. 호사카 교수는 더 이상 들어가면
매우 위험하다며 여기에서 돌아갈 것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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