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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비에서 호사카 히로시(保坂廣志 55 류큐琉球대학 법문학부) 교수를 만났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태평양전쟁 당시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고 오키나와 평화공원 조성에도 참여하는 등 반전 평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이날 일행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이토카즈호(系數壕)였다.
①이토카즈호(系數壕)
<이토카즈호 입구>
천연 종유석 동굴인 이토카즈호는 오키나와전 당시 병원으로 쓰였다. 길이는 270m이고 6백여명의 환자가 북적댔다. 그러나 동굴 안쪽
비교적 안전한 곳에는 군의관을 비롯한 군인들이 자리잡고 동굴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힘없는 사람들이 자리했다. 종군위안부는 굴 안에도 못들어가고 굴
입구 바깥쪽에서 생활했을 정도로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고, 거동이 힘든 중환자는 약을 먹여 살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군의관실에서 바라본 이토카즈호 내부. 사람들 안쪽에 보이는 목책 밑으로 우물도 있다.>
<이토카즈호내 취사장 모습>
굴 중심부 제일 상단에 군의관실과 치료실이 있다. 바로 근처에는 직경 1m정도의 우물이 있다. 이 물은 여름가뭄에도 잘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를 가니 취사장이 나타났다. 직경 60~80cm인 솥턱이 5개나 됐다. 반대편 입구로 나오는데 곳곳에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다. 천장에는 드럼통 껍데기가 뭉쳐진 채 달라붙어 있다. 미군이 이 굴을 포위하고 투항을 종용했으나 나오지 않자 휘발유를 넣은 드럼통을 굴 안으로 집어넣어 주민들을 나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굴에서만 약 16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②평화기념공원
오키나와섬 남쪽 이토만시에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이 일대는 오키나와전이 끝난 뒤 수만명의 주민들이 숨져 있던 장소다.
평화공원은 平和의 礎(초), 자료관(資料館), 국제평화연구소가 삼위일체가 돼 ‘평화의 발신지’로 구상됐다. 그렇지만 건설도중 혁신적이던 縣정부가
보수적인 縣정부로 바뀌면서 전체 구상이 후퇴됐고 국제평화연구소는 결국 설립되지 못했다. 2000년 4월 1일 문을 연 자료관도 당초보다 전시내용
등이 많이 변질됐다는 후문이다.
<평화의 초 한가운데 평화의 불을 밝히는 성화대가 있다.>
‘평화의 초‘는 전몰자의 이름을 새긴 돌 벽을 가지런히 세운 것이다.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군인 뿐 아니라 연합군,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새겨
놓고 있다. 각명비의 배열은 크게 오키나와 현민, 일본군, 연합군, 조선과 중국인 등으로 분류됐다. 일본군은 都道府縣별로 돼 있으나
오키나와 현민은 字別로 해놓았다. 1995년 6월 23일 제막식을 가질 당시 각명자 수는 오키나와 주민 14만여 명, 일본군 7만여 명, 미국인
1만4천여 명, 영국인 82명, 대만인 28명, 한국인 136명 등이었다.
한국인 각명비에는 오키나와 현정부가 명지대 홍종필 교수에게
의뢰해 확인된 한국인 희생자를 1997년부터 해마다 추가 각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올해 추가 각명자까지 합하면 한국인 각명자수는 총
3백44명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올해 끝나게 돼 내년부터 추가 각명은 없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호사카 교수는 말했다. 호사카 교수는 오키나와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1만2천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호사카 교수는 앞으로 어떻게 해서든 한국인 공간에 비어있는 돌에 한국인
희생자가 추가 각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인적사항을 자료관에서 확인해본 결과 이름과 출신지만
기재돼 있을 뿐 생년월일이나 사망장소, 사망일시 등이 젼혀 기재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피해자인 강제연행자들이 가해자인 일본군과 동열에 새겨
놓는 것을 불명예로 여겨 각명을 거부한 유족 등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평화공원 성화대에서 바라본 평화기념 자료관>
평화기념자료관은 24만 명의 죽음의 실태를 직시해 전쟁의 원인과 평화의 조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배우는 장소로 만들어졌다. 이 자료관의
기본구상은 전쟁의 잔학함과 평화의 존엄함을 민중의 눈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과학적 검증에 기초해 전시한다는 것이다. 당초 평화기념자료관은
1975년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나 오키나와 지방정부가 2000년 새로 단장해 지금의 자료관을 개관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초와
달리 상당부분 왜곡된다.
구 자료관을 둘러본 적이 있는 제주대 조성윤 교수에 따르면 구 자료관은 규모도 하잘 것 없고 초라했지만
주민증언을 토대로 일본군이 주민들을 학살현장으로 내몰았던 오키나와전의 실상을 사실대로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새로 마련된 자료관은 전시관을
대폭 늘려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졌지만 오키나와 전은 미군에 의한 주민피해가 부각됐고, 오키나와戰 이후의 복구부분을 늘려 종합적인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성격을 갖췄다고는 하지만 오키나와 전에서 일 제국주의의 만행은 가려져 버렸다고 했다.
<평화기념자료관을 새로 건립하면서 일 제국주의가 주민에게 가했던 만행이 가려졌다>
단적인 예가 자료관 한편에 있던 오키나와戰 당시 동굴속 상황을 재연한 공간이었다. 실제 동굴처럼 만들어진 이 공간에는 들어서자 마자
총을 든 일본군 인형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그 아래는 어머니가 아기의 목을 조르고 있고, 아기의 언니는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며 말리는 듯한
동작이다. 맞은 편 할머니는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고 있고, 할머니 앞에 있는 할아버지도 며느리에게 말리는 듯한 동작을 하고 있다. 할머니 뒤에
있는 남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다. 구 자료관에도 있던 이 상황 재연은 일본군이 어머니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기가 울자
위치가 들통날 것을 우려한 일본군이 아기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아기의 목을 조르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나 새
자료관이 마련되면서 오키나와 현정부는 이 재연에서는 일본군의 손에 든 총을 치워버리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
총을 치우지는 못했으나 총구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놓음으로써 일본군이 마치 주민을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그 곳에서 그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수학여행 온 일단의 학생들이 이 앞을 둘러보며 무심히 지나갔다. 과연 저들은 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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