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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왕조의 멸망과 오키나와전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5. 12. 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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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동안 일본 오키나와현에서 태평양전쟁 전적지를 둘러봤다. 오키나와 전적지를 언급하기 이전에 오키나와 전에서 벌어지는 참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자료를 토대로 류큐(琉球)왕국이 일본에 편입되는 과정과 오키나와 전에 대해 잠시 알아본다.

 

<자료사진. 류큐왕조의 상징인 슈리성의 모습>

 

  일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는 120여년전만 해도 독립왕국이었다. 1187년에 왕국이 세워져 1848년까지 661년동안 계속됐고, 한 때 중국은 물론 조선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이는 교역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다. 이 섬을 탐낸 에도시대 일본의 한 사쯔마번의 군대가 1609년 침략해 왕국을 점령했다. 이 때부터 이 섬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일본 본토가 明治시대로 접어들면서 1872년 류큐번이 설치됐다가 1872년 류큐왕조의 상징인 슈리성을 양도하고 오키나와현으로 탄생된다.

<자료사진. 일 오키나와의 민속촌>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은 일본인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르다. 그들의 문화 역시 일본 본토와는 판이하게 달라 오히려 중국문화의 영향을 더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주민들의 생활문화는 제주도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이번 방문에서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남방문화 특유의 느긋함도 갖추고 있다. 어쨌든 이런저런 연유로 오키나와 원주민들은 일본 본토에서도 같은 일본인이면서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당시만 해도 일본 본토에서는 오히려 조선인보다 더 하층민으로 취급했을 정도라고 한다.

 

<자료사진,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당시 모습>

 

  오키나와 전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내에서 치러진 유일한 지상전이자 최대규모의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20만 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는데 군인보다 오키나와 주민이 더 많이 희생당했다. 오키나와 전은 일본이 패전을 눈 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군.민을 총동원해 이른바 옥쇄작전을 폈다. 이를 통해 미군에게 본토결전을 벌인다면 훨씬 더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협상의 테이블로 나서도록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오키나와 주민을 대량 희생시켜서라도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 전쟁을 끝내고 천황제를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1945년 3월 말 1,500척의 미군함대가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이 때부터 미군이 오키나와를 완전 접수하는 6월 23일까지 일본 류큐제도(琉球諸島)의 오키나와에서는 피비린내나는 전투뿐 아니라 주민집단 자살 및 학살 등이 전개됐다. 수비하는 일본 제32군은 총 병력 10만 명 이상으로, 주력은 육군 제24사단과 제62사단, 독립혼성44여단 등 3만4천여 명이었다. 군사령관은 우시지마 미쓰루(島滿) 중장, 참모장은 죠 이사무(長勇) 소장이었다. 미군은 상륙부대의 주력으로 사이몬 버크너 육군중장이 지휘하는 신설 제10군 예하 제3해병군단과 육군 제24군단 등 5개 사단 8만5천 명을 투입하였다.

<자료사진. 미군이 오키나와전에서 탱크를 몰고 진격하는 모습>

 

4월 1일 오전, 미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주력 4개 사단 병력으로 가데나만(灣)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미군은 섬의 지협을 돌파하여 일본군을 남북으로 분리 차단하였으나, 일본군이 광대한 북부 지역을 포기하면서 방어선을 축소하고 험준한 남쪽 기슭의 산악지역으로 미군을 유인하여 미군의 본토 진격을 최대한 늦춘다는 전략으로 맞서 나갔다. 4월 5일부터는 일본군 사령부 슈리(首里)를 중심으로 한 무수한 동굴 진지가 미군의 큰 피해를 강요하여 공격이 한때 답보상태에 이르기도 하였다. 슈리는 옛 류큐왕조가 머물던 성이다. 일본군은 이 성 밑에 거대한 지하호를 파놓고 결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강한 화력에 힘입은 미군은 일본군의 반격을 격퇴하고, 5월 29일 슈리를 함락했다.
5월 31일, 일본군은 이미 전력의 85%를 잃었고 사령부는 섬 남단 마부니(摩文仁) 고지의 동굴로 퇴각하여 옥쇄(玉碎)의 준비에 들어갔다. 6월 11일에는 오로꾸(小祿) 지구에서 지상전을 벌이던 일본의 해군이 오오타 미노루(大田 實) 사령관 이하 전원이 자결했다. 지하호 등에서 저항하던 일본군은 6월 15일에 이르러 완전히 붕괴됐다. 6월 19일 사령부 참모가 전원 출격하여 전사했고, 6월 23일 오후 4시 30분 우시지마 사령관 및 죠 참모장이 할복 자결함으로써 전투가 종결됐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는 일본군 전사자는 6만~10만명, 미군 전사자는 1만2천~4만7천명이며, 이 전투의 최대 피해자인 오키나와 주민들은 12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민들의 피해가 가장 많았던 것은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미군은 빨간 귀신에 비유하고 잡히거나 투항하면 남자는 가랑이를 찢기고 여자는 강간당한다며 차라리 자결할 것을 강요했던 때문이다. 일본군은 그러면서도 전투에서 밀리면서 굴 안으로 피신하게 되자 주민들을 내쫓고 식량을 빼앗았으며 저항하는 주민은 살해했다. 심지어 우는 어린 아이가 있으면 적에게 발각된다고 엄마에게 아이를 죽여버릴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종전후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미군보다 일본군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증언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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