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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전적지 현장을 가다 2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5. 11. 2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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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나가노현 마츠시로(松代) 대본영 조잔(象山)지하호
 

 

마츠시로(松代) 대본영 조잔지하호는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나가노현 신슈(神州. 신이 내린 지역)의 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해 있다. 1944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면서 궁지에 몰린 일본은 미국의 공습을 피하고 전쟁을 더 끌면서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천황과 정부, 대본영을 이 곳으로 옮길 계획을 마련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대본영은 전시 또는 사변이 일어났을 경우 최고통수기관으로 우리나라의 계엄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 곳이 대본영 후보지로 선정된 것은 산악지형이어서 폭격위험이 덜하고 폭격이 있더라도 암벽으로 이뤄져 있어 비교적 안전할 것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마츠시로 대본영보존회 간사인 시마무라 신지(島村晋次)씨의 안내로 대본영 지하호를 둘러봤다. 시마무라씨는 지하호 안내에 앞서 일제당시 조선인들의 강제연행 피해 등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과한다고 진지하게 밝혀 우리 일행들을 잠시 숙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일대에는 천황이 거처하게 될 마이즈루(舞鶴)산을 중심으로 맞은 편에 일본군 최고사령부와 방송, 전화국 통신시설 등이 머물게 될 최대규모의 조잔(象山)지하호가 있으며, 마이즈루산에는 길이 2,600m의 지하호를 건설, 천황의 거처를 마련하고, 왼편 미나가미(皆神)산에는 길이 1,500m의 지하호에 황족들이 머물게 할 계획으로 공사가 진행됐다.
공사는 1944년 11월 시작돼 이듬해 일본이 항복하는 8월 15일까지 9개월간 진행됐다. 이 공사를 위해 조잔지하호에만 1만여명이 동원됐으며 이 가운데 7천여명이 조선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니시마츠와 카지마 건설회사가 민간노무인력을 동원해 공사를 맡았으나 인력동원 방법이나 명단 등은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이 지하호는 현재 나가노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90년부터 일반 시민에게 공개되고 있다.
조잔지하호 입구 오른편에 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가 서있다. 1997년 11월 11일 세워진 이 비는 이 곳에서 지하호공사를 하면서 숨진 조선인 희생자(3백~1천명 예상)들을 위해 시민단체인 '마츠시로 대본영 조선인희생자위령비건립실행위원회'가 세워놓은 것이다.
조잔지하호는 입구에서부터 다소 비좁은 터널을 70여m 들어서자 폭 4m, 높이 2.7m의 거대한 지하호가 눈 앞에 전개됐다. 내부에 각종 나무판으로 폭 3m정도의 방을 만들고 나머지 폭은 복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조잔지하호의 전체 모습은 바둑판 모양으로 전체 폭 400m에 20개의 지하호를 세로로 굴착하고, 50m간격으로 가로로 굴이 굴착돼 마치 바둑판 같은 형태로 이뤄져 있다. 지하호의 총연장은 5,900m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공개되고 있는 구간은 5백m에 불과했다.
 

<천장 위에 당시 쓰였던 착암기드릴이 빠지지 않은 채 그대로 꽂혀 있다>

 

지하호에는 발파작업을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꽂기 위해 파놓은 구멍도 많이 보였다. 당시 공사에 사용됐던 착암기 드릴이 벽에 박힌 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도 보였다. 시마무라씨는 이같은 것이 미공개 지역에 4~5개 더 있다고 말했다. 벽에 곡괭이 자국과 다이너마이트를 넣기 위해 뚫어놓은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시기에는 일본 뿐 아니라 일본군 점령지역에는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지하호 굴착을 위해 초등학교의 어린애들도 동원됐다. 어린 학생들은 강에서 모래를 모아오고 중학생은 작업차를 나르는 일을 맡았다고 전했다.
시마무라씨는 당시 노무자로 일했던 한국인 최소암(崔小岩)씨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노무자들의 생활상을 설명했다. 11월부터 시작된 지하호 굴착을 위해 노무자들은 한 겨울을 넘겨야 했지만 제대로 바람을 막을 수도 없는 허름한 함바에서 생활했다. 바닥엔 지푸라기를 깔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놓았다. 이불을 지급했지만 솜도 넣지 않은 이불이었으며 12시간 2교대로 일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위험한 곳엔 한국인과 중국인을 배치했다. 최선생은 착암기 기술자여서 다른 노무자에 비해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만 드릴이 멈추거나 조금이라도 딴 짓을 하면 오얏가타(지금의 십장)가 바로 달려야 철파이프로 때리곤 했다. 1991년 숨진 최선생은 당시 후유증으로 평생을 하반신이 불편한 채 살아야 했다.

<마츠시로 대본영 공개된 구간의 제일 마지막구간의 모습>

 

공개된 조잔지하호의 제일 마지막에는 이 곳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위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수천마리의 종이학으로 만든 두루마리가 걸쳐져 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일본어로 "와스레 나이레"(잊어버리지 마세요)라고 새겨진 판-역시 종이학으로 박아서 만든 것이었다-이 놓여 있었다. 잠시 숙연한 마음을 가졌다. 1985년 이후 이곳은 평화학습장이 되어 우리 재일동포 등은 물론이고 평화를 원하는 많은 일본인들의 방문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1시간이상 차근차근 설명을 들으며 하나하나 주의깊게 살펴보며 가는 동안 수많은 일본인들이 시끄럽게 떠들면서 스쳐갔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지하호를 둘러볼까" 궁금해졌다. 일본인 관광객을 인솔하고 있는 여행가이드의 설명에 잠시 주목했다. 이 지하호는 일본 천황을 위해 만들어졌고, 단단한 암벽이어서 매우 튼튼하게 잘 지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여행가이드의 설명에는 이 지하호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제동원됐고, 얼마나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피가 스며들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시마무라씨 같은 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이 정치적으로 좁혀지기가 쉽지 않겠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일정상 열차를 타기 위해 나고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도 시마무라씨의 설명은 계속됐다.
마이즈루산의 황거(皇居)는 산의 한쪽 귀퉁이를 깎아 집을 세우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나무를 심어 반지하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황거는 지하로 연결돼 위급시 지하어좌소로 곧바로 대피할 수 있도록 건설됐다.
마츠시로 대본영 보존회원으로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시마무라씨는 이같은 전쟁유적이 두 번 다시 만들어져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시마무라씨는 또 일제 말기 총동원령이 내려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쟁에 내몰렸지만 지금 일본은 그러한 사실을 어린 학생들에게 전혀 가르치고 있지 않다며 전쟁의 비극을 어린 학생들에게 알리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했다.
시마무라씨는 최소암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최선생이 이곳에 오기전 북해도 탄광에 있는 동안 일본인 노부부의 도움으로 그 탄광에서 빠져나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고 밝히고 "비록 최선생이 제국주의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겪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적인 교류도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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