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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나라(奈良)현 텐리(天理)시 야나기모토 비행장(大和海軍航空隊)
아침에 숙소를 나오자마자 텐리역에서 오늘 일정을
안내해줄 스카사키 마사유키(49. 塚崎昌之 오사카공립 이바라키고교 사회담당 교사)씨와 다카노 마사키(54. 천리고교 지리담당 교사)를 만나 함께
야나기모토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의 나카노 아키라(中野 晃 )기자도 함께 동행했다. 나카노 기자는 한국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해서 한국어도 제법 잘했다.
<야나기모토 비행장 활주로는 현재 일반자동차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야나기모토 비행장 활주로는 현재 일반 자동차 도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야나기모토비행장은 1944년 9월 15일 착공돼 1945년 2월
10일 완공됐다. 비행장이 완공된 다음날인 2월 11일 야마토 해군항공대가 아카톰보(연습기) 50여기를 갖고 출범했다. 그러나 7월들어 이
비행장에 제로센 50기가 날아오고 연습기 70여기, 폭탄 1,500발 등이 배치됐고 병력이 1,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8월 14일 미군의
공습으로 제로센 50기가 모두 출동해 실제 공중전이 벌어졌으며, 다음날 일본군이 항복한 15일 조선인들의 폭동을 우려해 제로센기가 다시 출동하는
상황이 벌여졌을 뿐 실제로 이 항공대에서 출격한 적은 별로 없다.
1990년대 (무라야마 총리 당시) 만들어진 이 비행장에 대한 설명서
팻말에는 2천~3천명의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비행장을 건설했다고 설명돼 있다. 텐리시와 텐리시교육위원회가 공동제작한 안내표시판의 끝부분에는
‘평화를 바라는 우리들은 역사의 사실을 밝히고 두 번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올바르게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표지판을 설치합니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우리를 안내했던 다카노씨는 근래 이 안내문을 만들었다면 아마 이같은 문구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 최근 일본에 확산되고 있는
수구적이고 보수우익 성향의 분위기를 시사했다.
비행장 건설은 건설회사인 오바야시(大林)구미가 맡았다. 비행장 건설에 고용된 조선인 노동자는
안내판에 씌여진 것처럼 2천∼3천명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앞서 마츠시로 대본영과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 노무자로 일했던 사람들의 명단 등은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다카노씨는 어쩌면 실제 조선인 노동자는 더욱 많을 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 일대는 주택지는 아니었지만 비행장
건설을 위해 신사와 절, 묘지 등이 모두 옮겨졌다. 현재 이 일대에는 방공호(25m×4.5m)와 무선교신을 위한 통신실 각 2기가 남아 있으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노무자들이 묵었던 함바로 추정되는 녹슨 양철건물이 남아 있다.
텐리(天理)시에는 해군소속 훈련병(豫科鍊)
1천2백여명이 현재 천리교 신자들이 숙소로 사용되는 츠메시오에서 머물며 야나기모토비행장에서 훈련을 했다고 한다. 이 일대에서 해군대본영이 위치할
예정이었던 지하호가 2년전 발견됐다. 또 천황이 마츠시로 대본영으로 옮기기 이전 잠깐 머물 예정으로 만들었던 지하호를 비롯 현재 확인된 지하호만
5개나 있다.
평범한 소도시인 텐리 지역이 중요한 전시장소로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각종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해군중추부의 작전에서는
6월에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이 여름에는 규슈에 가을에는 시코쿠에 상륙한다고 예상하고 본토결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기지로 안전한 긴키지방의 중앙에 있는 텐리를 최적의 장소로 선정하고 예과련으로부터 선발한 특공대를 천황 스스로 격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御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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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나라(奈良)현 카시바시(香芝市) 돈쯔루보(屯鶴峯) 지하호
야나기모토비행장을 둘러본 뒤 니죠산 자락으로 이동했다.
입구에서 돈쯔루보 지하호를 안내해줄 다나카 마사시(47 田中正志 초등 교사, 御所市 인권교육연구회 사무국장)씨를 만났다. 다나카 마사시는 학급
학생중 재일한국인이 있어 재일한국인 문제에 관심을 갖던 중 한일간 과거의 아픈 역사와 일제의 전쟁준비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 일대는 니죠산의 분화로 생긴 흰 응회암이 드러난 나라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승지라고 한다. 그러나 비닐하우스가 설치된 밭의 한쪽
옆으로 한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길로 어렵게 가다가 조그만 개울을 건너 20여m 올라가니 나무철책으로 입구를 막아놓은 지하호가
나타났다. 지하호는 다소 부드러운 응회암으로 이뤄져 다이너마이트 사용도 일부 이뤄졌으나 대체로 정과 곡괭이로
작업을 벌였던 흔적이 선명했다. 통로 폭은 3.3~4m로 총연장은 800~900m에 이르고 있다.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는 탱크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통로는 다시 좌우로 길이 연결되는 등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이어졌고 반대편 통로는
산중턱으로 나가는 연결통로도 있다.
돈쯔루보 지하호는 2개의 지하호가 마주보며 놓여 있다. 시멘트 벽을 바를 정도로 거의 완성된 서쪽 편에
있는 동굴은 현재 교토대 연구팀이 지진연구용으로 사용하고 있어 관람이 어려웠다. 우리가 둘러보 지하호는 동쪽 지하호였다.
이 지역 지하호는
일본군 19502사단에 의해 건설됐으며 1945년 6월 개설됐다. 이 곳 지하호 건설은 민간인의 동원없이 현역 병사들이 했으며 조선군관구에서
2백여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 1백여명은 징병된 조선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지하호의 건설목적은 명확하지 않다. 이곳에서 작업했던 한 일본군 통신병의 증언에 따르면 지하호 입구에서 한국의 영친왕 이은(李垠)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 육군 소장이었던 이은이 왜 거기 있었는지는 이 지역 지하호 보존회원들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지하호는 마츠시로 대본영의 황거(皇居)와 같이 지상에 관사로 쓰였던 일반 건물과 연결돼 있었다. 이 건물은 1970년대까지 존재했으나 지금은
통로입구도 막아졌고 건물형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로 미뤄볼 때 이 지하호는 당시 육군 항공참모였던 소화 천황의 남동생 미카사 노미야를 위해
건설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이 니죠산 주위에는 이 지하호 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군사시설이 있었는데 이 돈쯔루보 지하호가 이런 시설을
통괄하는 거점으로서 건설되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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