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알뜨르·송악산 벨트 ①알뜨르비행장·격납고
中대륙
발진기지 日본토사수 거점
한라일보 : 2005. 10.13
탐사
첫날(10월 1일)부터 비날씨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대정읍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도착하자 비는 그치고 오히려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됐다.
탐사단은 알뜨르비행장을 중심으로 섯알오름 지하 갱도진지, 송악산 어뢰정기지 등을 집중 조사했다. 마치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씨속에 첫날부터
강행군이다.
모슬포는 모슬봉을 기준으로 ‘웃뜨르’, ‘알뜨르’로 구분한다. 알뜨르는 제주도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에 속한다.
그래서 알뜨르를 끼고 있는 모슬포는 역사적 광풍의 진원지가 되곤 했다. 모슬포가 들썩이면 제주섬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1901년의 이재수란은
대표적이다. 1988년 송악산 군사기지 반대운동이나, 2000년의 송악산개발계획을 둘러싼 치열한 논란 등도 제주사회를 넘어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됐다. 절대왕조시대에는 유배지로 유명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이 곳에 비행장을 비롯 각종 군사시설을 구축한 것도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다. 남태평양을 바라보는 이 곳은 비행장 건설의 적지인데다, 중·일(中·日)전쟁과 일본토 사수를 위한 전진 거점기지로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알뜨르비행장은 일본 해군에서 구축한 제주도항공기지(육군은 비행장)다. 처음 비행장 건설은 1926년부터 계획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 중반까지 20만평의 비행장이 건설됐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대폭격의 발진기지로
활용된다. 이후 알뜨르비행장은 중국 난징·상하이의 해양폭격거점이 된다.
이에 따라
제주도항공기지에는 오무라(大村)해군항공부대가 주둔한다. 현재 모 부대가 위치한 곳이 오무라부대 자리라고 한다. 이 곳은 혈자리로서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역민들은 지금도 ‘대촌병사’ ‘절왓’이라 부르기도 한다.
오무라부대가
주둔하면서 알뜨르비행장의 면적도 40만평으로 확대됐다. 그 후 1944년에는 66만평, 1945년 태평양전쟁의 종전될 때까지 비행장 관련 면적은
80만평에 이르렀다. 활주로 규모는 남북방향 길이 1,400미터 폭 70미터, 유도로는 3,500미터×2,500미터에 이른다. 현재
알뜨르비행장은 공군의 비상활주로로 이용되고 있다.
알뜨르 벌판에 서면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의 참화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알뜨르에 나 있는 시멘트도로는 당시 비행장을 연결하던 유도로로 만들어졌다. 이 포장도로를 따라 알뜨르비행장 내에 들어서면 나지막히 엎드린 채
웅크리고 있는 돔형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볼 수 있다. 이 구조물은 다름아닌 당시 비행기를 감춰뒀던 격납고 시설이다. 격납고 안에는 일명
‘아카톰보’(Akatombo·빨간잠자리 비행기)라 불리던 비행기를 숨겨두었다.
아카톰보에 대해 탐사단의 조성윤 위원(제주대교수)은
“중일전쟁 당시에는 발진기지로 이용됐지만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전투기가 부족, 실제 이 곳에는 배치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격납고는 모두 20기가 분포해 있다. 이 가운데 19기는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모두 콘크리트로 위를 덮은
유개(有蓋) 격납고다. 나머지 1기는 콘크리트가 해체돼 잔해만 남은 상태다. 격납고는 아래 폭이 20미터, 높이가 4미터 내외에 이른다.
격납고는 근처 바닷가에서 가져온 잔자갈과 모래, 시멘트 철근 등을 혼합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격납고 위에는 흙을 쌓아 위장했다. 그
이유는 미군의 공습이나 폭격으로부터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비행장 활주로 인근에는 또한 지하벙커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지하벙커는 외부에서는 낮은 언덕처럼 보이도록 위장해서 만들었다. 역시 콘크리트 구조물인 지하벙커 용도는 현재로서는 불분명하지만 활주로
부속시설로서 통신시설이 아닌가 추측된다. 내부 벽면에는 사각형 홈이 여러개 파여 있다. 또한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안쪽에 관측용 통로가
위를 향해 나 있다.
하지만 이곳의 일본군 관련 군사시설은 많이 파괴됐다.
탐사단의 오문필 위원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통신시설 같은 것이 몇 기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때 고철수집붐이 일고 포클레인 등 중장비가 등장하면서 경작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파괴됐다. 때문에 지표조사를 통해 몇 기의 격납고가 있었는지 등 정확한 시설물의 종류와 위치 등을 파악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이를 통해 알뜨르비행장 일대에 대한 보존·활용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 본보 기획물인 ‘고난의
역사현장-일제 전적지를 가다’와 관련 증언이나 제보해주실 분은 본사(064-750-2251)로 연락 주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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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윤보석기자(팀장·사회부장)/이윤형기자(편집부
차장)/표성준기자(정치부)/이승철기자(사진부)
아카톰보란?
오렌지 색을 칠했고 잠자리처럼 날아다닌다고 해서 통칭 아카톰보로 알려져 있는 비행기다. 항공기술공창과 가와니시회사가 협력해서 개발한 해군
93식중간연습기다. 연습기이므로 조종석이 앞뒤로 2개가 있다. 1934년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미쓰비시 등 여러 회사가 5천6백대를 생산했다.
전투기와는 달리 사람들이 눈으로 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아까톰보라는 애칭이 붙여졌다.
[전문가 리포트]
일본 해군의 항공기지 역할
알뜨르비행장은
처음 중일전쟁에 대비하여 중국 공격 기지로 활용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 하에 1926년 구상되었다. 그 후 1차 공사(1931∼1935년)로
활주로 1,400m×70m에 규모 약 18만평으로 완성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군사적인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고,
결국 중국 난징 및 상해를 공격하기 위해 나가사키현의 오무라(大村) 항공기지를 알뜨르 비행장으로 옮기게 된다. 오무라 해군항공대 등의 주둔으로
알뜨르 비행장의 규모는 2차 공사(1937∼1938년)를 통해 40만 평으로 확장되었다.
제주도에서의 난징 공습은 36회, 연
600기, 투하폭탄 총 300톤에 달하였다. 그러나 1938년 11월에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서 오무라 항공대가 상해 인근으로 옮겨졌고,
제주도항공기지인 알뜨르비행장은 일시 오무라 해군항공대 연습비행장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상륙 가능성이 가장
많았던 이곳은 해안 전지거점 지역으로 진지화되었다. 1944년 10월 3차 공사로 비행장 규모는 66만 7천평으로 확대된다. 이 시기 모슬봉에
레이더기지를 설치하는 한편, 미군 공격으로부터 사람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한 항공기지 지하 격납을 시작하였다. 전투사령실, 격납고,
프로펠러조정장, 발동기 정비장, 계기시험장, 연료고, 통신실, 섯알오름 탄약고 등의 지하시설을 마련하였다. 나아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한 사령부
등 군사 주요시설의 지하 수용을 목적으로 하는 갱도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김동전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