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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 3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5. 12. 2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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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뜨르·송악산 벨트 (2)송악산 해안가
‘인간어뢰’라 불린 카이텐 비밀기지


한라일보 : 2005. 10.20

▲송악산 해안가에 일제가 파놓은 인공동굴. 지속적인 훼손 및 파괴 위협에 노출되고 있어 이에 대한 보호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남제주군 모슬포 일대의 일제 군사시설은 규모나 시설의 다양성 면에서 매우 주목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송악산 해안단애에 파놓은 인공동굴이다.

 송악산은 제주 남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복식화산이면서 이중화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1차 분화구내에 높이 104m의 분석구가 형성돼 있고, 그 가운데는 깊은 사발모양의 분화구(깊이 68m)가 뚜렷이 남아 있다. 제주섬 최후의 화산활동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자 화산지질학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이처럼 화산지질학적 가치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송악산 역시 일제의 전쟁야욕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다.

▲해안절벽 중간의 갱도(사진 위)와 천연해식동굴.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송악산 해안단애에는 인공동굴 15개가 바다쪽을 향해 나 있다. 대부분 직선형이지만 H형, ㄷ자형, 곡선형도 있다. 길이는 짧은 것은 6m, 긴 것은 40m정도에 이른다. 입구의 크기는 2.5m∼4.5m×2m∼4m 내외이다.

 왜 일본제국주의는 송악산 해안에 이러한 인공동굴을 파 놓았을까.

 이것의 용도는 다름아닌 자살공격용 어뢰정을 숨겨놓기 위한 기지로 구축됐다. 이 곳은 ‘인간어뢰’라 불린 자살특공어뢰정인 ‘카이텐’(Kaiten·回天:하늘로 돌아가다)의 기지였다. 즉 이곳에 ‘카이텐’을 숨겨놓았다가 밀물 때는 도크식으로 연결해 바로 바다로 어뢰정을 띄워 미군함대를 공격할 수 있도록 계획됐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제가 패망하면서 실제 송악산 해안에 카이텐이 배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천연해식동굴 2곳 또한 어뢰정기지와 관련 있는 동굴로 추정된다. 가장 남쪽 해안단애에 있는 인공동굴은 내부에서 아래쪽으로 계단을 만들면서 파들어가다 중간에 막혀 있다. 내부에는 사각형의 공간 2개가 남아 있다. 이 인공동굴은 아마도 천연해식동굴과 연결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공동굴 구축에는 제주도민 뿐 아니라 육지부 다른 지방 사람까지 동원돼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탐사단의 조사에 동행한 고태춘씨(78·제주시 도남동)에 따르면 일본인 사장 아래 경상도 말씨를 쓰는 감독(십장)이 있었고,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새벽 7시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 굴을 파는 일에 매달려야 했다. 당시 17세였던 고씨는 이미 파놓은 첫번째 굴에 양 옆으로 나무를 세워서 2층으로 숙소를 만들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면서 일했다고 한다. 그 안에 같이 수용된 인원은 대략 50명 정도로 기억했다. 그야말로 고난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뢰정기지로 구축된 송악산 인공동굴은 처음에는 길이가 50∼60m에 이를 정도로 길어 바로 바다로 연결되도록 돼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해안절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 길이가 짧아졌다.

 그 이유는 태풍 등에 의한 외부요인의 영향도 크지만 송악산 위로 차량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훼손·파괴가 지속되는 것도 한 요인이다. 이와 관련 송악산 일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서 차량의 적절한 통제 등 체계적인 보호방안을 수립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송악산을 안내하는 사람들은 이 곳을 ‘일오동굴’이라 소개하기도 한다. 굴이 15개니까 편의상 부르다보니 왜곡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때문에 조사연구를 통해 적절한 지명을 부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다.

/특별취재팀=윤보석기자(팀장·사회부장) 이윤형기자(편집부 차장)

표성준기자(정치부) 이승철기자(사진부)



카이텐이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최후의 수단으로 미군 항모나 구축함을 격침시키기 위해 만든 ‘인간어뢰’라 불린 자살공격용 어뢰.

 ‘카이텐’(Kaiten·回天)은 인간이 어뢰를 조종해서 적함에 돌진 타격을 가하는 특공병기다. 당시 일본 해군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던 93식 산소어뢰(전장 8.5m)를 개량하고 대량의 폭탄을 실어 잠수함에 최대 6기까지 탑재 출격했다.

 수중에서의 최고 속력은 시속 약 56m, 1944년 일본해군의 정식 병기가 되고 ‘카이텐’이라 이름을 붙이게 됐다. ‘카이텐’ 이름은 도쿠가와 막부의 군함 ‘Kaiten’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현장 인터뷰]日군사기지 건설 강제부역 고태춘씨

전쟁 참화 겪으며 소년에서 청년으로


 1945년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 제주도내 각 지역에서는 섬 전역을 요새화 하기 위한 노무자 강제징용이 전개됐다.

 당시 북제주군 한림읍 월령리에 살던 고태춘씨(78·제주시 도남동)는 17살의 나이로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 건설현장에서 고달픈 징용생활을 해야 했다. 세월이 흐른 뒤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싶었지만 지금껏 기회가 없었다는 고씨는 송악산 해안가에서 60년 전의 고통스런 기억을 담담하게 더듬어갔다.

 그는 1945년 3월부터 해방 직전까지 강제부역을 했다. 당시 열아홉 살 된 형이 부역대상자로 결정됐지만 병을 앓고 있어 대신 부역자로 가게 됐다. 월령리 마을에서 혼자 노무자 신분으로 징용된 고씨는 당시 마을에서의 징용권한은 마을리장이 행사했다고 말했다.

 “처음 마을에서 동원할 때는 일주일이면 된다고 말했지만 5개월이 넘게 일해야 했어. 노무비를 주겠다는 약속도 없었고, 일이 끝난 뒤에도 돈 한 푼 받은 적 없었지.”

 현장에서의 노동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고씨는 처음에 알뜨르비행장에서 갱도진지 위에 흙을 져 나르는 위장작업을 하다가 그해 4∼5월 무렵 이후에는 송악산 해안동굴을 파는 데 동원됐다. 새벽 7시에 일어나 저녁 8시까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현장에 일본군은 없었고 ‘오야가다’라고 부르는 일본인 사장과 경상도 말씨를 쓰는 십장(감독)이 있었다. 전라도 말씨를 쓰는 기술자들은 기계로 굴을 팠으며, 고씨 등 노무자들은 ‘도로코’(광차·鑛車)를 이용해 흙 운반작업을 했다. 십장은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일을 게을리하면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시 공사현장에서 동갑내기가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무비를 받지 못했으니 식사라고 해서 나을리가 만무했다. 일을 하는 5개월여간 하루 세끼 강냉이죽으로만 때웠다. 하루는 강냉이죽을 끓이는 장면을 그대로 목격했다.

 “가마니솥에 된장을 풀어놓고 소금 가마니를 뒤집어 통째로 쏟아부었는데 가마니 찌꺼기가 둥둥 떠오르더라고. 그걸 ‘긁갱이’(갈쿠리)로 긁어내는 걸 봤는데 도대체가 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어…”. 된장은 ‘절간 감자’로 만들었다. 고씨와 함께 송악산 해안가 일대에서 일한 사람들은 7백∼8백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측했다. 고씨에 따르면 군부대가 하청을 주면 공사현장의 십장이 행정기관을 통해서 사람을 동원하는 체제였다고 한다.

 이미 추억을 먹고 사는 나이가 된 고씨는 추억 아닌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너무나도 평범했던 한 섬소년에서 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른 고씨의 삶은 그 자체가 바로 고난의 역사이자 비극의 현대사를 웅변해주고 있다.

/특별취재팀



[전문가 리포트]피땀어린 역사교훈의 장

 일본군은 송악산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송악산∼사계리∼화순항∼월라봉에 이르는 해안가에 연합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해안 특공기지를 만들었다.

 일본 방위청 기록에 의하면, 제주도에는, 교룡(咬龍)·해룡(海龍)·회천(回天)·진양(震洋)과 주요 해상 특공병기가 배치될 예정이었다. ‘교룡’은 특수 잠항정, ‘해룡’은 날개 달린 잠수정, ‘회천’은 어뢰정, ‘진양’은 모터보트이다. 모두 사람을 태운 채 적함에 부딪혀서 자폭하는 특공병기이다. 이들 해상 특공기지는 송악산을 비롯하여 서우봉·삼매봉·일출봉·수월봉 등 5곳으로 확인되며, 현재도 그 흔적이 잘 남아있다.

 송악산 밑 해안갱도 부근에는 위와 같은 해상 특공병기를 접안시키거나 끌어올리기 위한 시설물을 바다 속에서부터 갱도까지 50∼60미터 가량의 길이로 만들어놓았다. 이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석탄을 캐서 나르듯이 레일을 깔아서 흙을 날랐는데, 가스불과 군용 삽 하나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 작업은 전적으로 제주사람을 비롯한 조선인에게 맡겨졌다.

 이제 제주도내 일제 군사시설은 현지 조사와 새로운 자료 발굴 등으로 그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이들 시설은 일제가 일본 본토를 지켜내기 위해 제주도민을 볼모로 삼아 옥쇄(玉碎)하겠다고 했던 ‘결(決)7호’ 작전의 결과물이다. 또한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노역을 했던 피와 땀이 어린 역사적 현장이다. 일제의 전쟁 유산이라고 해서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될 역사 교훈의 현장인 것이다.

<박찬식/제주대강사·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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