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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현장’일제전적지를 가다 10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2. 2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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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日본토를 가다

③ 야나기모토비행장·돈즈루봉지하호
미군 日 본토상륙 대비한 특공기지


한라일보 : 2005. 12.08

▲돈즈루봉지하호 내부를 살펴보고 있는 조사단.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日 보다는 알뜨르비행장이 원형 잘 보존

“강제동원 조선인 허기·중노동에 시달려”


마쓰시로대본영에 이어 특별취재팀이 찾은 곳은 야나기모토비행장과 돈즈루봉지하호·고요엔지하호다. 취재에는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 기획과 관련 일본측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스카사키 마사유키씨(塚崎昌之·오사카부립 이바라키시니시 고교교사), 일본 아사히신문의 아키라 나카노기자(中野 晃), 마이니치신문 취재진이 조사팀의 활동을 취재하는 등 현지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야나기모토비행장

 야나기모토(柳本)비행장은 나라현(奈良縣) 텐리시에 있다. 남제주군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처럼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일본토상륙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야나기모토비행장에는 무라야마 총리 당시 텐리시와 텐리시교육위원회가 세운 안내표시판이 서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여기에는 “평화를 바라는 우리들은 역사의 사실을 밝히고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올바르게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표지판을 설치합니다”라는 문구가 세워져 있다.

 취재팀을 안내한 스카사키씨 일행은 이와 관련 현재와 같은 일본내 분위기에서는 이 같은 안내표시판을 설치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일본사회가 우경화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야나기모토비행장은 항공기를 적의 공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엄체호와 통신시설, 일천황의 거처예정지로 판 4백미터 정도의 지하호 등 일부 시설이 남아 있다. 1943년 가을부터 공사에 착공, 1945년 2월 비행장이 완성된 후 ‘아카톰보’가 이곳에 배치됐다. 이어 1945년 7월에는 제로센 50기를 배치 미군 상륙에 대비한 특공대를 조직했다. 활주로는 현재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야나기모토 비행장 시설(사진 위)과 비행장 건설 당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수용됐던 비행장인근의 함바시설.
 비행장 주변에는 조선인(한인)노동자들이 수용됐던 ‘함바’가 현재도 남아 있다. 이 함바에는 현재도 조선인 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야나기모토비행장 건설회사는 오바야시(大林)구미로 당시 2천명에서 3천명 정도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위안부 시설도 비행장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야나기모토비행장에는 당시의 시설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이 곳보다는 오히려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이 조성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군사시설 연구와 구축과정·실태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돈즈루봉지하호

 돈즈루봉지하호(屯鶴峰地下壕)는 미군의 본토상륙에 대한 육군특공작전 지하전투사령부로 계획되고 만들어진 요새다. 마쓰시로대본영이 천황과 군 정부기관 방송국등을 옮기기 위한 시설이라면 돈즈루봉지하호는 일본군이 미군의 본토상륙에 대비한 특공작전기지로 만들어졌다. 이곳은 현재 하이킹코스로 인기가 있다.

 돈즈루봉지하호는 오사카(大阪)와 나라현의 경계지점에 있는 산의 중턱을 파고 건설한 두 곳의 지하호를 말한다. 총연장은 2km에 이르며 격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쪽의 지하호는 통로의 폭이 3.3∼4m 정도, 전체길이는 9백여m 정도에 이른다. 다른 곳은 교토대연구팀의 지진연구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돈즈루봉지하호는 응회암과 비슷한 지질구조를 갖고 있어 착암기를 이용하거나 곡괭이 등으로 파들어갔다. 착암기로 1m 정도의 구멍을 뚫고 맨 끝에 화약을 집어넣은 상태에서 폭파시키는 공법을 사용했다는 것. 또한 일부구간의 벽과 천장에는 곡괭이 등으로 작업한 흔적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돈즈르봉지하호 건설은 1945년 봄부터 시작됐다. 미군이 1945년 가을에 규슈(九州)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 항공기에 의한 특공작전용 기지로 만들었다. 육군의 특공작전을 지휘하는 항공총군(航空總軍)의 사령부는 오사카 大正비행장(현재 야오비행장), 전투사령부는 바로 이곳 돈즈루봉지하호에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취재팀을 안내한 다나카 마사시씨(田中 正志·御所市인권교육연구회 사무국장)는 당시 통신병의 증언을 빌려 이 곳에 영친왕 이은(李垠)도 왔었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은 12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제가 패망할때까지 육군 중장으로 있었다. 영친왕은 통신병 소속부대의 사령관(항공총군사령관)으로서 소장이었다고 했다. 영친왕 이은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이 지하호 연구자들도 잘 알지 못한다고 한다.

 돈즈루봉지하호 건설에도 조선인(한인)이 동원됐다. 다나카씨에 따르면 이 곳에서는 7백∼8백명의 일본군이 일했고, 이 가운데 3백명 정도가 조선인 이었다는 것. 이들은 명목상 병사들로 무기 대신 곡괭이와 삽 등을 가지고 굴 파는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들은 배가 고파서 다이너마이트를 씹어 허기진 배를 달랬다. 다이너마이트를 먹으면 달다는 사람도 있고 취한 상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는 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강제동원 실태 등은 아직까지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특별취재팀


日 신문, 조사팀에 관심집중

마이니치, 현지방문·취재내용 상세 보도


▲본보특별취재팀의 일본 현지조사 및 고요엔지하호 방문사실을 보도한 마이니치 신문 11월14일자와 16일자.
 일본의 유력지인 마이니치 신문은 조사단의 현지조사 활동을 연이어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나타냈다. 마이니치는 특별취재팀의 일본 현지취재기간인 지난달 14일과 16일에 걸쳐 방문장소와 일정 및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조사위원회의 방문의미 등을 보도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11월 14일자 석간에서는 8면 7단 박스기사로 ‘지하호에 빛을-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이 건설’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고요엔지하호’ 및 ‘돈즈루봉지하호’를 시찰하는 일정을 예고기사로 내보냈다. 이 신문은 조사팀의 방문할 두 곳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많은 조선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며 “고요엔지하호 내부에는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낸 ‘조선국독립’ ‘녹색의 봄’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조사단이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여 잊혀져가고 있는 전쟁의 산증인들에게 새로운 빛을 비춰줄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보도했다.

 마이니치는 11월 16일자에도 25면 톱기사로 사진과 함께 ‘가혹한 작업 벽에 새기다-한국의 조사단, 니시노미야의 고요엔지하호 시찰,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

 마이니치는 조사단의 고요엔지하호를 방문한 11월 15일 현지조사활동을 동행취재한데 이어 다음날인 16일자 기사에 이를 기사화 했다.

 마이니치는 조사단이 재일조선인 서원수씨(81)의 안내로 고요엔지하호 조사 내용을 전하면서 “이 지하호는 효고현(兵庫縣) 재일코리언들이 만든 시민단체의 증언조사로 구(舊) 일본해군의 사령부와 지하공장 건설을 목적으로 일본에 살고 있던 재일조선인과 강제연행된 사람들도 공사에 동원된 사실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이어 이 신문은 취재팀과 함께 동행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조사위원회 이병례 조사관의 발언을 인용 “한국정부는 과거사를 규명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해야 할 일은 당시 (강제동원등의) 공사를 맡은 기업의 자료공개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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