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본토를 가다 ④고요엔지하호
지하호 벽면 ‘朝鮮國獨立’
선명
한라일보 : 200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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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서원수씨(맨 왼쪽)의 안내로 고요엔지하호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조사단. 니시노미야시 당국의
특별공개와 함께 일본 취재진이 몰려 관심을 끌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 |
효고현 니시노미야시(西宮市)에 있는 고요엔(甲陽園)지하호는 강제연행된 조선인(한인) 노동자들의 나라잃은 설움과 한(恨),
노동의 고통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 곳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해군의 항공기 부속품 공장을 위한 지하터널로 구축됐다는 점에서 관심이 모아지는
곳이다. 무엇보다 지하호 벽면에는 ‘조선국독립’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당시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삶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지하호는 1945년 3월, 오사카 해군시설부의 관할하에 대림조 등 다섯개의 건설회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은 그동안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가 1987년에야 발견됐다.
고요엔지하호가 위치하고 있는 이 일대는 오사카·고베지역에서도 이름난 고급 주택지다.
고요엔지하호는 어느 개인주택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집주인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야만 한다.
일본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이 곳에 대한
개방을 금지한 상태다. 특별취재팀을 안내한 서원수씨(81·효고현조선인강제연행조사단 부단장)에 따르면 “한일관계 등 국제정세가 악화되자 공개를
막은 것 같다”며 “일본정부는 현재도 이 지하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니시노미야시 당국은 그동안의 공개금지 조치를 풀고
특별취재팀에게 이 곳 방문을 허용했다. 특별취재팀에 한국정부가 설치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2명이 합류하자 1년
3개월만에 공개한 것이다. 특별취재팀은 일본 아사히신문과 마아니치신문 취재진의 카메라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니시노미야시 관계자와 고요엔지하호를
1백30회 정도 안내한 서원수씨를 따라 지하호 내부로 들어섰다.
집 담벽사이 겨우 30cm정도 될까 말까한 통로를 따라 들어가자
지하호로 들어가는 철문이 나타났다. 고요엔지하호는 초반부 60∼70여m쯤 까지는 콘크리트를 한 아치형 구조로 구축됐다. 터널을 파고 난 뒤
콘크리트를 덧씌운 형태다. 한자로 쓰인 ‘조선국독립’이란 다섯글자는 콘크리트로 마감한 오른쪽 벽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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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國獨立(조선국독립)’과 ‘春(춘)’자 등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고요엔지하호 벽면(사진 위)과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지하도 내부의
모습. | |
세월이 흐르면서 희미하게
변했지만 글자는 뚜렷이 알 수 있다.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자 누군가가 판자에 칠하는 콜타르를 이용해서 썼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또한 벽면에는
한자로 春(춘)자와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들도 새겨져 있으나 뚜렷하지가 않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일본군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조선국독립’과 ‘봄
춘’(春)자를 글자를 새기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지하호를 파는 과정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고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지하호를 파는 과정에서 다이너마이트 폭파로 희생당한 조선청년 4명의 유골이 인근 사찰에 모셔져 있다. 또
고요엔지하호 건설에는 적게는 5백명에서 많게는 2천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강제연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하터널 공사장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는 2천명에 이르는 조선인 숙소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이 패전하자 1945년 8월 15일 저녁 고요엔지하호 부근에서는 ‘만세’를 부르는
함성이 그치질 않았다고 한다.
고요엔지하호는 항공기 부품공장을 위한 시설답게 규모가 크고 견고하게 구축됐다. 폭이 3m에 높이가
2.5m∼3m에 이르지만 어떤 구간은 광장처럼 넓었다. 길이 1백20m 정도의 터널이 3개 뚫려있고 이를 연결하는 터널이 바둑판처럼 연결된
구조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어 마치 작은 지하호수를 연상케 한다. 벽과 천장에는 굴착기로 바위를 뚫은 흔적인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니시노미야시 당국은 벽면에 철심을 박아놓고 1년, 3년 등 주기적으로 관찰하면서 지하호 내부의 변화를 파악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김해가 고향으로 일본에 건너온지 73년이 됐다는 서씨는 “일본정부는 아직까지 조선인들을 강제연행 하지 않았다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이 곳에서 일한 조선청년들은 돈 1원도 받지 못하고 추방당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누가 거짓말하고
있는지는 이 지하호를 보면 안다고 서씨는 말했다.
이날 취재팀의 조사에는 일본언론의 보도를 보고 찾아온 제주출신 재일동포 3세도
있었다. 할아버지(이두생) 고향이 북제주군 한림읍 월령리(982번지)로 현재 고향에는 친척들이 살고 있다는 재일동포 3세 이정애씨(30·동대판시
거주)는 “일본언론의 보도를 보고 취재팀의 조사에 참여하게 됐다”며 고요엔지하호를 답사하고 난 후 재일조선인들의 수난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특별취재팀의 조사 후 고요엔지하호를 안내한 니시노미야시 도시계획과 요네다계장은 “작년부터 미공개했지만 이번에
정부관계자가 포함된 조사팀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요엔지하호는 ‘조선국독립’이란 글자가 새겨진 유일한
곳이자 강제동원의 실상과 재일조선인들의 한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우리 정부에서도 이 곳의 보존 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특별취재팀
[인터뷰]日 전쟁유적 전문가 스카사키
마사유키씨
“제주·일본 공동연구 실행 기뻐”
스카사키
마사유키씨(塚崎昌之·오사카부립 이바라키시니시 고교 교사)는 ‘제주도에서의 일본군의 본토결전 준비-제주도와 거대군사시설’ 논문을 발표한 일본
전쟁유적 전문가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 모슬포 섯알오름·송악산 및 알뜨르비행장 일대에 구축한 지하 군사시설의 공사진척도를
보여주는 ‘제주도항공기지위치도’(濟州島航空基地位置圖)를 일본 방위연구소에서 찾아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본보가 탐사 보도하고 있는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와 관련 일본측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카사키씨는 “이번에 제주(한국)의 조사팀과 일본의
공동연구가 실행돼서 무척 기쁘다”며 제주도의 지하 갱도진지와 관련해 말문을 열었다.
스카사키씨는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에 구축된
지하 갱도진지는 1944년 말이나 1945년 초부터 공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도 지반이 부드러운 경우에는
2∼3개월이면 공사를 거의 마무리 한 것으로 보아 제주도의 경우는 오히려 공사하기 쉬워서 2∼3개월이면 팠다고 봐야 한다는
것.
이와관련 스카사키씨는 모슬포 섯알오름 지하 갱도의 경우 1944년 말 계획해서 1945년 초부터 파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했다.
스카사키씨는 또 “1945년 6월 일본 육군 자료를 보면 제주도에 32km길이의 지하호를 파겠다는 계획이 있는데 아마도
가마오름 주변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요코스카해군기지나 마츠시로대본영 등 같은 시기 일본의 지하진지가 최대 16km에 이르고 규모가 모슬포
섯알오름 보다 큰 것은 사실이지만 제주도 지하진지의 경우 대부분 동원된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것, 32km의 지하진지 건설계획이 서 있는 점,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본토 못지않게 중요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스카사키씨는 이어
본보 탐사보도와 관련 “관련 연구자와 신문사 뿐 만 아니라 제주학생들과 재일동포 및 유학생 등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스카사키씨는 내년에 학생들을 데리고 제주도를 방문, 바른역사를 체험하게 하고 싶다며, 본보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와 같은 탐사작업도 젊은 세대와 연결해서 할 수 있는 연대체계를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