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제1부를 마치며
日군사시설 60년만에 재조명 큰
반향
한라일보 : 200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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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어승생악 갱도진지 실측조사, 1945년 당시 알뜨르비행장의 고사포,
제주도를 찾은 일본조사팀, 일본 고요엔지하호를 조사하고 있는
특별취재팀. | |
○…본보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 탐사 보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제주도에
구축한 각종 군사시설을 조명하기 위한 ‘역사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패망한지 60년만에야 본격적으로 이뤄진 첫 시도라는 점에서
도내외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탐사보도는 본보 특별취재팀과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일본의 군사유적 전문가 등 제주·일본이 공동
네트워크를 구성 조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로 평가된다. 그 동안의 취재과정과 성과를 살펴본다.…○
제 1부는 남제주군 대정읍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서부터 일본 오키나와까지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와 일본의 군사시설을 비교하기 위한
시도다. 대정읍 모슬포 일대는 다양한 일제 군사시설이 가장 잘 남아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 및 각종
관련시설과 섯알오름 지하의 거대한 지하 갱도진지 및 고사포진지, 송악산 해안가의 특공기지와 오름지하의 갱도 등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 군사시설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곳이다. 특별취재팀이 알뜨르비행장 일대를 우선 집중 탐사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슬포 일대의
탐사에서 취재팀은 송악산 섯알오름 지하에 구축한 지하갱도와 각종 시설들을 보여주는 ‘제주도항공기지위치도’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뒀다.
일본방위연구소 도서관에 소장중인 이 도면은 작성시점이 1945년 5월 1일 현재로 돼 있어 당시 시점까지의 공사진척도를 보여준다는 것이 일본
군사유적 전문가인 츠카사키 마사유키씨(塚崎昌之)의 견해다.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사이에 당시 미군
무장해제팀이 제주항과 모슬포 일대에서 촬영한 사진자료 67점도 처음으로 공개돼 큰 관심을 끌었다. 미국 매릴랜드주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중인 이들
사진자료는 일제가 제주섬에 배치했던 전쟁무기와 섯알오름 고사포진지의 원형 등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자 무기제거 및 폭파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꼽힌다.
특히 특별취재팀은 제58군사령부의 주둔지였던 한라산 어승생악에서
대규모 지하진지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내부 총연장이 3백미터 이상인 이 지하진지는 직선형과 격자형이 혼합된 구조로 58군 사령부가
한라산 어승생악(해발 1,169m) 일대를 최후의 저항진지로 삼아 각종 요새를 구축했음을 보여준다.
특별취재팀은 모슬포 및 한라산
어승생악 집중 탐사에 이어 제주와 일본토의 군사시설을 비교하기 위해 지난 11월 13일부터 18일까지 해외취재에 나섰다.
일본
현지취재는 정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2명이 합류하고, 일본의 전쟁유적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본보의 일본 현지취재는 일본 언론에도 관심이 됐다. 일본 유력지인 마이니치와 아사히신문, 오키나와의 류큐신보가 취재팀의
조사일정과 활동 상황 등을 동행취재 보도하기도 했다.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고요엔(甲陽園)지하호는 일본정부에 의해 지난해 8월부터 개방금지
조치가 취해졌지만 취재팀을 위해 15개월만에 특별공개하기도 했다.
특별취재팀의 일본방문에 이어 일본 전쟁유적전문가들도 제주를 찾아
공동조사를 벌이는 등 교차 조사가 이뤄지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라는 지적이다.
지난 23일 제주에 온 츠카사키 마사유키씨 등 3명의
일본조사팀은 24일부터 28일까지 본보 특별취재팀 및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팀과 함덕리 서우봉 해안의 특공기지 및 안덕면 당오름·단산, 한경면
이계오름, 대정읍 송악산 해안가 특공기지에 대한 공동 조사를 벌였다.
이러한 특별취재팀의 탐사보도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내년 한햇동안 일제강점기 제주도에 남아있는 일본군 군사시설 구축과정에 강제동원된 노무자와 군인 군속에 대한 조사에 나서기로
하는 등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5월 출범한 일본의 ‘진상구명 네트워크’에서도 본보 기획물을 번역 일본어판 홍보책자로 만들기로
하는 등 일본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이처럼 본보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 탐사보도는 그동안 제대로 조명조차
안된 채 방치됐던 일본군 군사시설과 강제동원의 실상을 제주·일본의 공동조사를 통해 입체적으로 접근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제1부:알뜨르비행장에서 오키나와까지·끝>
[전문가 리포트]강제동원 산물
연구 높이 평가
한라일보
특별취재팀과 함께 한 일본 지역 ‘태평양전쟁 당시 조성된 시설물’ 답사를 통해서 필자는 이들 시설물을 제주도의 그것들과 비교할 수 있었다는 데
그 의의를 두고 싶다. 특히 주로 살펴봤던 ‘땅굴진지’의 경우 아래와 같은 3종류의 형태로 파악할 수 있었다.
첫째는
‘본부시설형’ 땅굴진지라 불릴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제주도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것들로 마츠시로(松代)대본영 터나 코요엔(甲子園)
지하호의 형태처럼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전투 지휘나 생산 시설 이전과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지하호의 형태는
‘전투형’ 땅굴진지와는 달리 폭이 성인 남자 5∼6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4∼5m 정도나 되었고 이는 다시 약 1:5 정도의 비율로 통로와
‘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바둑판 모양처럼 규격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둘째는 제주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들과
같은 ‘전투형’ 땅굴진지라 명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들 ‘땅굴진지’들은 제주도의 것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히 불규칙하고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전체 길이는 2∼3km 이상으로 매우 길며 그 폭과 높이는 성인 2명이 겨우 서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바로 오키나와의 ‘구해군사령부 기지’이다. 오키나와 ‘구해군사령부 기지’는 그 내부의 벽과 천정이 상당
부분이 콘크리트로 마무리되어 있어 목재로 마무리를 하였다고 하는 제주도의 그것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기본적인 구조는 유사하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자연형’ 땅굴 진지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오키나와에서 주로 보이는 이 형태는 자연 동굴에 지역민과
더불어 일본군들이 숨어서 ‘옥쇄(玉碎)’를 준비하였던 곳이기에 매우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땅굴진지’ 중
두 번째의 ‘전투형 땅굴진지’를 주로 조성하였다는 점은 일제가 ‘본토결전’에 있어 상정한 제주도의 용도를 쉽게 파악하게
해준다.
이와 같은 형태의 ‘땅굴진지’에서 일본군들은 미군에 저항하였고 또 저항하려고 준비하였다. 이처럼 일본군들이 ‘땅굴진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 알다시피 미군의 항공 전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약 전쟁이 좀 더 지속되고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투형’ 땅굴 진지가 주를 이루고 천연 자연동굴이 산재한
제주도에서 어떠한 형태의 전투가 전개되고 또 얼마만큼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지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유추가 가능하다.
두서없이
언급하였지만 ‘땅굴진지’ 등과 같은 ‘일제 조성 시설물’들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점들이 있다.
첫째
그것은 바로 단순히 군사사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들 시설물들에는 그것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의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또한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무슨 이유로 이들 시설물들을 조성하는 데 동원되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제조성시설물’들을 살펴보는 것은 일제하 광범위하게 전개된 일제 강제동원의 한 산물을 연구, 파악하는 점에서 평가되어져야 하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심재욱/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