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탐라문화연구소 공동 실체규명 나서
한라일보 : 2006. 02.23
제2부 ‘베일 벗는 日本軍 실체’ 연재 시작
학술세미나·日전문가
공동네트워크 형성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를 일본토 결전의 장으로 삼기위해 주둔했던 일본군의 실체와 관련 군사시설에 대한
집중 조명이 이뤄진다.
본사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 특별취재팀은 제1부 ‘알뜨르비행장에서 오키나와까지’에 이어 제2부
‘베일 벗는 일본군 실체’를 통해 일본군주둔지와 배치상황, 도민 뿐 아니라 다른지방 사람들까지 강제로 동원 구축한 갱도진지 등 각종 군사시설에
대한 탐사보도에 나선다.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 말기 오름과 해안가 등에 구축한 갱도진지 및 특공기지 등에 대한 현장조사와 증언채록 등 무려
7만5천명에 이르는 일본군 주둔실태 및 역사적 의미 등을 조명하게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은 제58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산하에 제111사단, 121사단, 96사단, 108여단 등 중무장한 병력을 대거 배치 미군과의 본토결전에 대비했다. 그렇지만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일본군의 주둔실태와 갱도진지 등 군사시설에 대한 실체규명은 물론 강제동원된 도민들의 정신적·물질적 고통 등은 아직껏 밝혀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본사 특별취재팀은 제1부에 이어 제2부에서도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조사를 벌이는 한편 일본의
군사전문가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등 국제공조를 통한 실체 규명에 나서고 있다.
이와함께 이달 27일부터 3월2일까지 한국과 일본의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학술세미나를 개최, 60년 전 주둔했던 일본군의 실체와 주민 강제동원의 실상 및 각종 군사시설 등 아픈 역사를
조명하고 현장조사에도 나설 예정이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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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취재팀과 탐라문화연구소, 일본의 전문가 등이 공동으로 당오름에
구축된 갱도진지를 조사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지난해 12월말 탐사단이 조사한 송악산 외륜분화구 사면의 대형 갱도진지 내부
모습. | |
日본토결전 대비 7만5천명 중무장 병력 집결…60년전 일본군
실체 아직 규명안돼 조사 시급
강제동원된 도민 고통·恨 등 아픈 역사 생생
프롤로그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제주는 아름다운 섬이다. 한반도와는 다른 자연문화 유산에다 독특한 인문지리적 환경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광의
이면을 한꺼풀 벗겨보자. 제주는 수난과 고통스런 역사로 점철된 섬 임을 알 수 있다. 이 땅을 지켜온 사람들 가슴에서부터, 해안가와 오름,
한라산까지 역사의 상처는 곳곳에 깊은 생채기를 드리우고 있다.
제주가 평화로웠던 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제주는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해양과 대륙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모색하고 생명력을 이어와야만 했다. 고대에는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교역로상의
주요한 거점역할을 했다면, 근세에는 제국주의 세력의 각축장으로서 제주는 늘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만도 이재수란 당시 프랑스 등 구미열강의 각축과 냉전시대의 ‘4·3’, 태평양전쟁 말기의
일(日)본토사수를 위한 군사요새화 등은 이 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정부가 2005년 1월 제주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것도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겪어온 고난의 땅 제주에서 더 이상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아니다.
그렇지만 이 땅이 진정 고난과 고통의 역사를 걷어내고 ‘평화의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 단지 평화만을 내세운다면, 그 평화는 실체가 없는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평화의 섬’에
전쟁의 그림자는 곳곳에 남아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은 제주섬에 무려 7만5천명에 이르는 중무장 병력을 주둔시켜 놓고 미군과의 일전불사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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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취재팀과 日 전문가가 소록산 정상에서 정석비행장 일대를 살펴보고
있다. | |
그
많은 일본군은 어디에 어떻게 배치됐고 본토결전에 대비했을까.
이에 대한 단서가 되는 것이 일본군의 배치도인 ‘제주도(島)
제58군배비개견도(配備慨見圖)’이다. ‘배비개견도’에는 수많은 오름마다 진지를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주저항진지’ ‘복곽진지’
‘전진거점진지’ ‘위장진지’ 등 유형에 따른 진지가 해안에서부터 한라산 고지대까지 구축됐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제주섬에 주둔하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2월이다. 이 시기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이 예상되던 시점이다. 상황이 다급해진 일본은 미군과의 본토결전에 대비해
7개방면의 육·해군결전작전 준비에 들어간다.
이에 따라 4월15일 제58군사령부가 신설되고 그 휘하에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독립혼성 제108여단 등 정예병력이 속속 제주에 집결 해안가와 오름마다 갱도진지 등을 만들었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31년부터
모슬포에 제주도항공기지(알뜨르비행장)를 건설하기 시작하는 등 대륙침략을 위한 기지로 이용했다.
일본군은 제주 서남부와 서북부,
중부, 동부지역으로 분산 배치되고 각 주둔지에는 집중적으로 갱도진지 등 군사시설이 만들어졌다.
한라산 어승생악(해발
1,169m)에 최후의 저항진지를 구축한 제58군을 중심으로 제111사단은 미군의 상륙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한 제주도 서남부 지역에
주둔한다. 서남부 지역에는 가장 밀집된 형태로, 또한 대규모로 일본군 군사시설이 남아있다.
원물오름·당오름·이계오름·저지오름·단산·군산·산방산·월라봉·논오름 등등 이 일대 오름은 전부 갱도가 구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21사단은 바리메오름을 중심으로 제주도 서북부 지역에 주둔했다. 제96사단은 제주시 산천단 일대에, 제108여단은
거문오름·부대오름 일대에 주둔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군의 주둔지를 중심으로 각종 갱도진지 등이 구축됐으나 그 실상은
단편적으로만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당시 진지구축에 강제동원된 도민들의 고통 등은 광복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恨)으로 묻혀있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일지에 따르면 전쟁기간 동안 대략 3만명의 제주출신 젊은이들이 공장노동자나 전쟁노무자로 일본에 징집됐다. 이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약 7분의 1에 해당한다. 실로 많은 도민들이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0년전 일본군이 어디에
주둔하고 어떤 군사시설을 구축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이 과정에 도민들의 고통은 어떠했는지 등 실체규명이 시급히 이뤄져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전문가 리포트]피와 땀이 배인 ‘고난의 역사현장’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와 한라일보가 공동으로 전개하고 있는 ‘일제하 제주도의 일본군 군사유적’에 대한 조사 활동이 5개월째
이르고 있다. 그동안 조사팀은 해방 직전 제주도에 주둔했던 제58군 사령부,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독립혼성 제108여단 등
일본군 주력 부대의 주둔지를 찾아 탐사하였다. 조사팀은 현장 조사와 더불어 이들 부대의 제주도 이동 및 구체적인 병력 배치 현황, 정확한 주둔지
위치 등을 규명하는 데 주력했다.
조사팀은 일본군 방위청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당시 일본군 기밀문서를 입수하여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방 직후 일본군 무장 해제를 담당했던 미군정의 다양한 보고서 등 관련자료를 수집·분석했다. 특히 미군이 작성한 일본군 병력배치도 및
진지위치도 등 2건을 새로이 입수해 각 지역별 부대 배치상황과 완성된 갱도진지 분포 상황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뒀다.
2005년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진행된 조사에서 조사팀은 모슬포 및 알뜨르비행장 일대와 한라산 어승생악 일대, 제58군 사령부의 주력부대인 관동군
제111사단이 주둔했던 제주도 서남부 지역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매주 토요일 실시된 탐사를 통해서 드러난 참호진지 및 갱도는 우리를
경악케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강제동원된 선배들의 피와 땀이 어린 고난의 역사 현장 앞에서 숙연한 자세를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탐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진중한 마음으로 역사와 현장에 다가가는 마음을 가져본다.
<박찬식/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