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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4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3. 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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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111사단 주둔지 ①원물오름
일본군 최정예부대 사령부 주둔지


한라일보 2006. 03.16

▲오름사면이 함몰되면서 꺼진 구덩이 내부의 지하갱도 입구로 탐사팀이 진입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갱도입구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지하갱도의 내부 모습.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30m 길이의 지하갱도 첫 확인 성과…무너져내진 갱도 흔적 10여곳 산재

 어느 햇빛 좋은 날 원물오름(院水岳) 정상부에 올라보라. 멀리 해안쪽으로 산방산이 우뚝 서 있고 월라봉·군산·단산·송악산·모슬봉 등 제주 서남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를 한라산으로 옮기면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복곽진지를 구축했다는 돌오름을 비롯한 오름군이 파노라마처럼 다가선다. 원물오름 이웃에는 당오름·도너리오름이 반갑게 솟아 있다.

 원물오름·당오름 일대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제111사단 사령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물오름에 올라보면 왜 일본군이 이 곳 일대를 제111사단 사령부 주둔지로 점을 찍고 요새화 했는지 짐작이 간다. 바로 제111사단 전체구역을 관측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이다.

 원물오름은 안덕면 동광검문소 북쪽 약 1km 지점의 서부관광도로변에 위치한다. 표고 459m의 오름으로 정상부는 서쪽으로 말굽형화구를 이룬다. 동광일대는 제주∼대정, 제주∼서귀포, 한림을 연결하는 교통요지다.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려 있다.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원스레 뚫린 도로 위로 차량들이 쉴새없이 질주한다.

 원물오름의 지리적 중요성은 예전 왕조시대부터 이 곳 일대에 원(院)을 두었던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원이 있었기 때문에 오름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샘은 원물이라 불렸고, 오름도 자연스레 ‘원물오름’이 되었다.

 ‘제58군배비개견도’ 등에 따르면 원물오름과 이웃한 당오름 일대는 일본군 제111사단 사령부 주둔지로 나타난다. 원물오름·당오름·도너리오름이 서로 원을 그리는 형태로 ‘주저항진지’로 표시돼 있다. 이 곳을 거점으로 일본군 최정예부대인 제111사단(사단장:이와사키 도미오 중장·市부대라 불림)은 제주에서의 일(日)본토결전을 준비했다.

▲갱도 내부벽에 조명기구를 놓기 위한 홈.
 탐사팀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조사와 증언채록을 병행했다.

 이 곳에 대한 탐사는 지난해 말부터 세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일본군 주둔지였음에도 불구, 이 일대에서 제대로 된 갱도는 그 동안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탐사팀은 최근에 오름사면이 함몰하면서 그 아래 숨겨져 있는 갱도를 찾을 수 있었다. 탐사팀으로서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오름 서사면 3부능선에 있는 이 지하갱도는 중간부분이 내려 앉으면서 자연스레 입구가 됐다. 함몰부분은 폭이 2m40cm×2m30cm 크기에다 깊이가 2m60cm 내외로 구덩이가 형성됐다. 탐사팀은 이 함몰부분으로 줄사다리를 설치해서 조심스레 갱도 안쪽으로 진입했다. 갱도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열로 시야가 어두운데다 입구바닥은 송이층이 쌓여 좁고, 또 질퍽질퍽해서 진입하는데 애를 먹었다.

 이 지하갱도는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왼쪽으로 각도가 약한 나선형으로 통로가 이어져 있다. 실측결과 총 길이는 30m 규모로 파악됐다. 폭은 90cm∼1m 내외, 높이는 1m70cm∼2m 규모다.

 이 지하갱도는 끝부분이 공사가 중단된 상태로 남아있다. 또 갱도의 후반부에는 당시 불을 밝히기 위한 기구를 놓기 위해 만들었던 10cm 크기의 홈도 확인된다. 지하갱도의 폭이 좁은 것으로 볼때 아마도 내부에 병력이 상시 주둔하기 보다는 이동로 형태로 구상해서 만들다가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지하갱도 아래쪽으로 또하나의 갱도입구가 확인된다. 아마도 탐사팀이 먼저 확인한 지하갱도 입구는 원래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갱도방향도 일치한데다 함몰하면서 생긴 입구와 거리가 7m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이 곳 입구에서부터 갱도를 파들어 간 것으로 보인다.

 원물오름 북사면 기슭에는 갱도입구로 추정되는 곳 3∼4개를 비롯 무너져내린 것으로 보이는 흔적 등 10개 정도가 죽 나 있다.

 이처럼 원물오름 일대는 일제강점기 뿐 아니라 19세기 말에는 방성칠 난의 무대로, 4·3때는 ‘무등이왓’ 등 잃어버린 마을과 큰넓궤·삼밭구석·조수궤 등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된 항쟁과 비극적 역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특별취재팀=윤보석·이윤형·표성준·이승철 기자



[현장인터뷰]안덕면 동광리 김여수씨 “日군수품 실은 구루마 왕래 잦아”

 태어나서 지금까지 안덕면 동광에서 살아온 김여수씨(안덕면 동광리·1932년 생, 실제 나이는 1930년 생)는 1945년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씨는 당시 일본군 갱도를 파는데 강제노무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원물오름·당오름·도너리오름 등 주변 오름에 굴(갱도)이 많았고 이 일대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오름 굴내부에 탄약고가 있었고, 시루등(당오름 동쪽 공동묘지 일대)부터 볼래왓터(원물오름 북쪽 금악휴게소 인근)까지가 죽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볼래왓터에는 쌀이 엄청 많이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철수하면서 쌀에 불을 질러버려 15일 정도 탔습니다. 나중에 그걸 먹으려고 했는데 시커멓게 타서 먹지를 못했습니다. 또 별 두개짜리 사령관(111사단 사령관 추정)도 거기에 살았습니다.”

 김씨는 또 일본군들이 당시 말 6마리를 이용해서 포를 구루마에 싣고 옮겼다고 증언했다.

 “화순항을 통해서 들여온 쌀이나 포 등 군수품들은 구루마에 싣고 동광을 거쳐 옮겨갔습니다. 말은 앞에 세 마리, 뒤에 세 마리가 포를 실은 구루마를 끌고 한 사람이 말을 타서 앞장서 가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말은 타고 다니는 건 얼마 안되고 주로 구루마 끄는 용으로 이용했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씨는 이와함께 당시 굴(갱도)은 전부 일본군인들이 팠다고 말했다. 굴 내부는 소나무를 대고 널판지를 씌워 흙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는 것. 그 뒤 일본군들이 철수한 다음에는 그 나무를 가져다가 집지은 사람들도 많다고 증언했다. 당오름 등에 파진 굴은 ‘4·3’사건 때는 사람들의 피난처로도 많이 이용됐다고 덧붙였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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