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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제주도와 일본군 전쟁유적지’ 학술세미나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3. 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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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日군사시설 다각적 조명 필요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한라일보 공동주최


한라일보  2006년 03월 01일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와 한라일보사는 28일 제주도 중소기업지원센터 회의실에서 ‘일제말기 제주도와 일본군 전쟁유적지’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에는 일본 군사전문가와 국내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해 주제발표에 이어 열띤 토론을 펼쳤다.

 허남춘 탐라문화연구소 소장은 이날 개회사에서 제주도내 일본군 전쟁유적지가 역사와 관광자원이 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조사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강만생 한라일보사 사장은 환영사를 통해 해방 60주년을 맞아 실시되는 일본군 전적지에 대한 실상조사는 평화의 섬 제주의 미래상을 구현하기 위한 단계라고 평가했다. 발표문과 토론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제1주제:일제하 제주도내 일본군 전적지의 연구방향과 과제

(좌장=김동전 제주대 교수)


한·일공동조사 연구·과거사 규명 의미…제주, 제2차세계대전 연구 시발점으로

◆발표요지


▲조성윤 교수
 ▷일제하 제주도 일본군 전쟁유적지 조사연구의 방향과 과제(조성윤 제주대 교수)=제주도내 일본군 군사시설은 그동안 언론매체에서 다루면서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략적인 작업 말고는 조사가 이뤄지지 않다가 탐라문화연구소와 한라일보의 공동작업으로 주둔 실태와 구축 과정, 강제동원, 제주도의 전략적 가치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전쟁유적은 전쟁의 실상을 체험하게 해 다시는 전쟁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는 평화운동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일본군 군사시설은 제주를 찾는 이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한 평화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는 일제하 일본군 전쟁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작업이 이뤄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마사유키 연구원
 ▷조선에서의 일본군의 본토결전 준비:정정과 그 후 판명된 것을 중심으로(츠카사키 마사유키 일본15년전쟁연구회 연구원)=일본군의 작전은 어떤 것인지 병사를 어떻게 사용하려 했는지 제주도 전쟁유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일본군은 1945년 7월 이후 육군 참모본부의 지시에 의해 해안선에 진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해안선 가까이에서 전투를 벌이면 단기전이 되고 일본군은 전멸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미군에 타격을 줄 가능성도 커진다. 이는 일본이 병사의 목숨을 군 장비 중에 하나일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목숨을 존중받지 못한 군인들이 제주인 및 강제동원된 조선인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와 전쟁말기 제주도 군사시설에 대한 연구는 일 제국주의와 일본 민중, 조선인이라는 식민지 구도를 밝히는 작업으로 연결할 수 있다.

▲허수열 교수
 ▷제주도에 있어서 조선인 강제동원(허수열 충남대 교수)=조선내의 강제동원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국가기록원이 일본으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당시 작성된 임시군인군속계라는 명부에 의하면 등재된 인원수가 4만6천1백64명인데, 본적이 제주도인 사람이 9백81명이다. 이는 조선전체 평균에 비해 약 2배 높은 비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4백62명이 제주도내 7450부대에 징용됐다. 또한 군속선원명표에 따르면 조선 전체의 군속선원수 가운데 제주도 본적자수가 1천1백95명으로 전체의 17%나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제주도민은 일제 강제연행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것이 명백하다. 그들은 제주도내 7450부대를 비롯한 군부대 혹은 군속선원으로 강제 연행됐다.



◆토론요지

 ▷미즈노 나오키 일본 교토대학 교수=전쟁유적지에 대한 연구조사는 일본의 전체 식민지 정책이나 조선사회의 상황 등과 연관시켜 진행돼야 한다. 일본 식민지 당시 조선임시보안령 관련 사건 등 건수를 보면 1944∼1945년에 갑자기 증가하고 있다. 이는 그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전쟁에 협력하겠다는 생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며, 일본군은 조선인을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임을 입증해준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제주지역 연구를 시작으로 육지 더 나아가서는 남태평양도 조사해 제주도를 한국에서의 2차대전 연구의 출발지로 삼았으면 좋겠다. 2차대전 연구가 한국에서 부진한 것은 2차대전 끝나고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해 상대적으로 2차대전이 덮어졌기 때문이다. 제주도 역시 4·3연구에 몰두하다가 최근에야 4·3이 해결 국면에 들어서면서 2차대전의 경험을 보는 것 같다.

제2주제:제주도내 일본군 전적지 조사연구

(좌장=강문규 한라일보 논설실장)


제주 전적지 일본현지보다 보존 잘돼…유적지와 도민 삶 상관관계 규명해야

◆발표 요지


▲황석규 연구원
 ▷일제전적지 현장조사 결과보고(황석규 탐라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박찬식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1945년 4월 제주도 방비 강화를 위해 제58군사령부가 신설돼 만주 관동군 등을 포함해 종전 직전까지 4개월 사이에 7만여명에 달하는 병력이 제주도에 집결했다. 조사팀이 일본군 방위청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기밀문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제주도 주둔 각 병력의 이동 및 배치상황, 각 사단 예하부대의 편제 등이 상세히 밝혀져 있다. 일본군은 미군부대가 상륙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을 제주도의 서남부 지역으로 판단하고 정예주력부대인 관동군 제111사단 1만2천명을 배치했다. 이에 따라 제주도내 여타 권역에 비해 참호 및 진지갱도의 구축 공정이 해방 전에 완결된 곳이 많고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박찬식 연구실장
 ▷구술을 통해 본 일제하 제주도내 강제동원의 분석(지영임 탐라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제주도 강제동원유형의 특징 중 하나는 1944년과 1945년을 전후해 상당수의 제주도민이 노무 또는 징병으로 동원됐다는 것이다. 징병의 경우 1924년생부터 1926년 5월생까지 동원됐으며, 제1갑종 합격을 받은 사람들까지 제주도내에 동원됐다. 노무동원은 14살 어린이부터 60세 노인까지 동원됐다. 14∼15살의 경우는 부친대신 동원됐으며, 3년에 걸쳐 수차례 동원되거나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비행장의 경우는 인근 마을주민들이 격일로 동원되기도 했다. 또한 군인은 사단과 연대가 주둔한 곳 주변의 진지구축에 동원됐으며, 노무동워의 경우에는 그러한 곳의 출입이 제한되고 주로 비행장건설에 동원됐다.

▲지영임 연구원
 ▷미군에 의한 제주도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허호준 한겨레신문 차장)=미군 제24군단은 남한에 진주한 뒤 제주도의 일본군 상황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중대한 문제로 인식했다. 미군 제24군단 무장해제팀이 19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도착한 뒤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철수가 이뤄졌다. 미군은 폭발물 처리반 기술사관들을 참여시켜 군수품과 비행기를 폭파하는 등 10월 6일 무장해제작업을 완료했다. 일본군이 각종 무기를 어느 부대, 어느 지역에 배치했는지를 분석하면 일본군의 당시 전략을 연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과 제주도, 미·일의 격전과 제주도의 상관관계, 제주도민의 강제동원의 배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토론 요지

▲허호준 차장
 ▷한동주 제주도 문화예술과장=기존에 제주도가 용역을 의뢰해 발표한 제주도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 보고서에 따르면 도내 갱도진지는 모두 1백13곳에서 3백43개이며, 증언에 의하면 5백22개가 늘어나 7백50개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역사성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규모나 용도 등 문화재적 가치에서 어떻게 보존해야 할 것인지 조사해야 한다.

 ▷다카무라 료헤이 일본 고베 야마테대학 교수=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일본군 중에도 조선인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 있는 반면 친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것을 통해 일본인이나 조선인 가운데서도 여러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점은 바로 구술사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이번 발표에서는 노무동원인지 징병인지를 분류했는데 구술사냐 문헌사냐가 아니라 큰 역사와 개인사로 파악해야 한다.

 ▷오문필 한라일보 일제전적지 탐사위원=일본군 전쟁유적지를 탐사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참고하고 있지만 극히 기초적이다. 일본군 전쟁유적지는 지역 주민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한라일보 보도를 통해 도민들의 관심을 촉구시켜 제보를 받으면 상당 부분 도움이 될 것이다. 전쟁유적지는 전술·전략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므로 이에 대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하다.

 ▷신주백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1945년 일본 작전계획은 승리가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해 협상에서 유리한 점을 끌기 위한 종전대책 일환이다. 전쟁유적지는 44년 이전과 45년 이후에 제주도민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등 지방사 측면에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제주도내 강제동원과 전쟁유적지를 다른 지역과 비교분석하면 제주지역만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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