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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현장’일제전적지를 가다 12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2. 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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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日 본토를 가다 ⑤오키나와의 전적지
특공정기지·갱도 등 제주와 유사


한라일보 : 2005. 12.22

▲오키나와 요미탄비행장 인근 바닷가에 있는 특공정기지. 송악산 해안의 특공기지와 유사한 이곳엔 현재 4개가 만들어져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韓人 1만∼2만여명 강제 동원

 1945년 3월 26일 미군은 오키나와의 게라마(慶良間)제도에 대한 공략에 들어간다. 이 때부터 6월 23일까지 약 3개월간에 걸쳐 오키나와를 무대로 미-일 최후의 지상전이 전개된다. 이 기간에 오키나와 주민을 포함 미·일 양국과 조선인(한인) 등 모두 24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오키나와 전은 처음부터 일본군이 일본토 결전을 위한 시간벌기로 전개됐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이다. 제주도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토결전을 위한 많은 군사시설들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오키나와와는 여러모로 비교된다.

 특별취재팀은 일본토에 이어 오키나와를 방문 지하진지인 구해군사령부호, 가가쓰고지(嘉高地), 피난호로 이용됐던 치비치리가마 및 요미탄비행장 인근의 히지야(比謝川) 하구 특공정기지, 평화기념자료관 등을 둘러봤다.

 이 가운데 요미탄 비행장 인근 히지야 하구에 있는 특공정기지는 제주도 모슬포지역의 송악산 해안가에 남아있는 해안진지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 지점은 미군 상륙작전의 중심지로 이에 맞서 일본군은 해안가에 인공 굴을 파고 폭뢰를 탑재한 특공정인 진양대(震洋隊)를 배치했다.

 이 곳 해안가에는 이러한 특공정을 숨겨놓기 위한 인공 굴 4개가 뚜렷이 남아 있다. 길이는 대략 30m 정도, 폭 2m 내외, 높이 역시 1.5∼2m 내외로 마치 송악산 해안의 특공기지인 카이텐기지를 연상케 했다.

 굴에서 바다까지는 레일이 깔리고 굴 속에는 ‘마루레’라는 암호명을 가진 특공정을 배치했다가 미군함정이 접근하면 특공대원 1명이 20노트의 속력으로 돌진해서 폭뢰를 투하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마루레’는 길이 5.6m, 무게 약 1톤으로 합판으로 제작한 엔진이 붙어있는 보트지만 실제로는 몸으로 부딪치는 자살특공용 인간병기인 것이다.

▲특공정기지 내부에서 바다를 바라본 모습, 이곳 주민들의 낚싯배가 굴 안에 있다.
 특공정기지를 안내한 이곳 주민에 따르면 “당시 노무에 동원된 병사들이 구타 등을 당하면 ‘아이고’ 하는 비명소리를 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런 말을 하는 민족이 어느 나라냐”고 취재팀에게 물었다. 바로 한국인들이라고 하자 “당시 조선인들이 많이 동원됐고 조선인은 인간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키나와전이 끝나자 조선인들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으며 아마도 전부 죽었지 않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도미구스쿠시(豊見城市)의 구해군사령부호(海軍司令部壕)는 4백50미터에 이르는 지하진지로 오키나와전쟁 당시 실제 전투가 벌어진 지하요새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 곳은 현재 전시관과 기념품점, 정상에는 전망대 등이 설치돼 전적지관광코스로 개발 활용되고 있다.

 이 곳에는 사령관실과 막료실, 암호실, 의료실, 하사관실, 작전실, 발전실, 비상통로 등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있다. 미군이 공격해오자 해군호 내에서 수류탄으로 자결한 흔적인 파편자국들이 벽면에 선명히 남아 있어 처절했던 전투상황을 짐작케 한다.

 구해군사령부호는 70∼80㎝ 폭에 높이 2m 정도의 좁은 갱도-넓은 곳도 있지만-가 구불구불 이어져 마치 제주도의 가마오름 지하갱도진지를 연상시킨다. 벽에 갱목 등이 세워진 당시의 모습 등도 그대로 남아있어 만들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했다. 1970년부터 관광코스로 개발된 이곳은 일본군에 대한 찬미만이 강조된 전적지라는 비판이 오키나와 주민들로부터 제기된다.

▲옛 해군사령부로 내부·갱목시설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오키나와 역시 비행장건설과 해상 특공부대의 지원 등을 위해 1944년 8월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수는 1만에서 2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군위안부 역시 1천명 정도가 연행돼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추정치일 뿐이고 정확한 실태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양 지역에 대한 비교조사와 교류 등을 통해 오키나와에서의 한인피해 및 강제동원의 실상등을 규명하는 것이 과제로 제기된다.

 오키나와에서 특별취재팀을 안내한 류큐대학 법문학부의 호사카 히로시(保坂廣志)교수는 “오키나와에도 조선인 강제연행이나 종군위안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이 많다”며 “양 지역의 교류가 이어졌으면 좋겠고 이번 특별취재팀의 방문이 첫걸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전문가 기고]“한인 강제동원피해 실체규명 과제”

 한라일보 ‘일제전적지특별취재팀’의 취재에 합류하여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내 주요지역에 구축된 군사시설물을 조사했다.

 마츠시로 대본영, 야나기모토 비행장, 고요엔 지하호 등 거대 군사 시설물 구축에는 수많은 조선인(한인)이 강제 동원됐고 아직도 지하호에는 그들이 흘린 피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듯했다. 현재 일본, 남태평양 등 국외로 동원된 노동자가 2백만(당시 서울시 인구는 120만)가까이 되고 한반도 내 각종 군사시설물, 군수물자 생산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5백만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제의 전시 인적자원 동원은 합법성을 가장한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따른 조선인의 정신적, 물질적 피해는 심각한 것이었다. 해방 후 60년이 지났지만 일본은 전쟁책임을 제대로 인정하고 반성한 적이 없으며,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따른 조선인 피해의 실상은 총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았고 동원 당사자나 그 가족의 한은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한반도 내에서의 동원은 규모나 동원방식 등 해명해야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국내지역 안에서의 동원은 국외 동원보다 공간이동이라는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피해에 대한 인식이 덜할 수는 있으나 동원의 목적과 방식 등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제주지역 군사시설 구축을 위한 도내·외 주민 동원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일제의 전시 동원 실상이 총체적으로 파악되기 위하여 동원 당사자의 개별 피해가 우선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동원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던 징용장이나 허울뿐인 저금통장은 없어지고 역사적 사료가 될만한 것들은 점점 소멸되어가고 있다. 당시의 경험을 증언해줄 생존자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과거’ 자신의 행적이 들춰지는 것이 두려워 유골 반환도 기업명부 요구도 외면하고 있다.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있지만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하여 피해의 구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개별 피해 확인과 함께 보다 중요한 부분은 당시의 역사성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한국사에서 혹은 세계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하고 자리매김 해야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은 어떻게 해서 광적으로 전쟁에 빠져들어 갔는가, 일제의 조선인 동원 논리는 무엇이었고 협력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활용되었는가, 일제의 식민지배와 전시 동원은 동원 당사자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어떻게 작용했는가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명하는 단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의 전시 동원에 균열을 가져오게 한 조선인의 움직임은 어떤 것이 있었으며 미래 역사에서 어떤 점들을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명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병례/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 진상조사위원회 조사관>


류큐신보, 취재팀 조사활동 보도 관심

 특별취재팀의 오키나와 방문과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군사시설 조사에 대해 오키나와 일간지인 류큐신보(琉球新報)가 사진과 함께 자세히 보도했다.

 류큐신보는 취재팀의 현지방문 기간인 11월 18일자에서 ‘전쟁은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라는 제목아래 취재팀의 이틀간의 오키나와 방문일정과 함께 현장조사에 동행취재 보도하는 등 관심을 표명했다.

 이 신문은 기사에서 “조사단은 오키나와의 전적지를 방문하여 군민혼재(軍民混在)였던 60년 전 전쟁의 실태를 전적지를 통해 조사했다”며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 본토와 제주도의 전적지를 비교하여 앞으로의 조사에 반영시킬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조사팀은 태평양전쟁 말기 구일본군이 만든 비행장과 사령부로 이용한 동굴 등 지금도 제주도에 남아 있는 전쟁유적을 조사하고 있다”며 지난 9월부터 제주대학교와 한라일보가 공동으로 조사를 벌이고 있는 사실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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