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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현장’일제전적지를 가다 9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2. 23.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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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日본토를 가다 (2)마쓰시로대본영
韓人 강제동원으로 건설된 지하요새


한라일보 : 2005. 12.01

▲일반인에게 공개된 마쓰시로대본영 조잔지하호 내부 전경.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1944년 11월 11일 산으로 둘러싸인 나가노현 신슈(神州)의 분지에서는 첫 발파작업이 이뤄진다. 이 곳 주민들에게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 이 발파공사의 이름은 ‘마쓰시로 창고공사’로 불려졌다. 일본 최대의 지하호중의 하나로 꼽히는 마쓰시로대본영 공사는 비밀리에 진행됐다. 지하호 공사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날때까지 계속됐다.

 이처럼 철저한 베일속에 마쓰시로대본영 지하호 공사가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은 천황과 천황을 중심으로 작전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일본군 최고사령부, 즉 대본영 이전을 위한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패전위기에 몰리자 천황중심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도쿄에 있던 대본영을 이곳 나가노현 마쓰시로에 이전, 거대한 지하호를 구축하면서 본토결전에 대비했다. 이 과정에 많은 조선인(한인)이 고통과 희생을 당했다.

 마쓰시로대본영은 세개의 삼각축을 이루고 있다.

 천황과 일본군 최고사령부·대본영의 참모가 들어설 마이즈루야먀(舞鶴山)와 황족들을 위한 미나가미야마(皆神山), 일본정부와 방송(NHK) 중앙전화국 통신시설 등을 위한 조잔(象山)지하호가 그것이다. 마이즈루야마지하호는 길이가 2천6백m, 이나가미야마지하호는 1천5백m의 지하호 시설이 구축됐다. 특별취재팀이 집중 취재한 조잔지하호는 전체길이가 5천9백m에 이르는 마쓰시로대본영 최대의 지하호다. 이 가운데 1989년 80m 구간이, 1990년부터는 5백m가 일반에 공개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마쓰시로대본영 최대의 지하호인 조잔지하호 입구에 세워진 조선인 희생자 추모비.
 마쓰시로는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 다이묘(大名)의 거리였다고 한다. 지금도 조잔지하호로 가는 길 주변에는 1백70년전 만든 사무라이 집들이 남아있어 전형적인 일본풍으로 가득하다.

 조잔지하호 입구에는 ‘조선인 희생자추모 평화기념비’가 서 있다. 1977년 11월 11일 세워진 이 비는 이 곳에서 지하호 공사를 하면서 숨진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비다. 약 3백∼1천명에 이르는 조선인 희생자를 위해 마쓰시로대본영 조선인희생자위령비건립실행위원회가 세워놓은 것이다. 추모비 옆에는 무궁화가 심어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조잔지하호의 전체 구조는 마치 잘짜인 바둑판을 연상시킨다. 20m 간격으로 20개의 갱도가 세로로 뚫려 있어 전체 폭은 4백m가 된다. 또 이것을 연결하는 연락갱도가 50m 간격으로 가로로 나 있다. 공개된 지하호 내부 폭은 4m, 높이는 2.7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지하호 벽면에는 당시 굴을 팠던 착암기의 철제 로드가 박혀있고 목재편도 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히 보여준다.

 일본군은 폭 4m에 이르는 지하호 내부에 3m 부분은 방으로 나머지 1m부분은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나무로 시설물을 만들었다. 일본이 패망으로 전쟁이 끝나자 회사가 자재를 부숴버렸고, 지하 입구에 남아있던 갱목 등은 함바에 살던 조선인들이 땔감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하호 통로의 규모로 볼때 마쓰시로대본영의 조잔지하호는 남제주군 대정읍 모슬포 섯알오름 지하 갱도진지와 유사하다. 최대 폭이 4m 정도에 이르는 섯알오름 지하 갱도진지의 경우도 완공후 마쓰시로대본영처럼 내부에 각종 공간을 만들어 활용하도록 계획되고 공사가 진행됐다.

▲조잔지하호 내부 모습을 그린 도면. 마치 바둑판을 연상시키듯 격자형으로 정교하게 나 있다. 현재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조잔지하호에는 조선인이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나라잃은 민족적 설움과 아픈 역사를 말없이 보여준다. 지하호 벽면에 한문으로 새겨진 大邱府(대구부)라는 글씨는 강제동원된 조선인의 고향이 경상도 대구임을 보여준다. 시마무라씨(마쯔시로대본영 보존을 권장하는 모임 간사)에 따르면 천황의 거처공간으로 조성된 마이즈루야마지하호에는 한글도 남아 있다.

 이곳에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지하호 끝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 일을 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중노동에 시달리다보니 ‘도로코’에 깔리는 사고도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인간의 생명이나 존엄성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시마무라씨는 이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로 일했던 고 최소암씨(1991년 사망)의 증언을 토대로 “돼지우리와 같은 허름한 함바에서 짚을 넣은 이부자리로 수수와 콩, 소금물로 연명한 그야말로 생지옥 같은 생활이었고 조선인들은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쓰시로대본영 지하호 공사는 이처럼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많은 고통과 희생아래 진행됐다. 그러나 현재 그 숫자와 실태에 대해서는 일부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조사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이에대한 조사 역시 이뤄져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미니박스] 마쓰시로대본영 보존 어떻게 하고 있나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최대의 지하호중의 하나인 마쓰시로대본영은 문화유산으로서 활용 및 보존사업이 한창이다. 1985년부터 전쟁의 진실을 배우고 평화를 맹세하기 위해 지하호의 보존·공개, 평화기념관 건설운동이 이 지역의 고교생과 교사들로부터 시작됐다.

 이어 마쓰시로대본영의 보존을 권장하는 모임 등 시민단체의 운동이 열매를 맺어 1990년 조잔지하호의 일부가 공개됐다. 현재 이 곳에는 초·중·고생을 비롯 연간 13만명에 이르는 관람객이 찾아 평화학습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1994년 마쓰시로대본영평화기념관 건설 실행위원회를 발족하고 현재 1백% 모금에 의해 기념관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인터뷰]시마무라 신지 마쓰시로보존모임 간사

“조선인 강제연행 사과합니다”


 “개인적으로 일제하에 벌어진 조선인(한인) 강제연행에 대해 사과합니다. 다시는 이 같은 전쟁유적을 만들지 말았으면 합니다.”

 마쓰시로대본영 보존을 권장하는 모임 간사로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시마무라 신지씨(島村晋次)는 특별취재팀과 만나 마쓰시로대본영 및 조선인 강제연행과 관련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사과의 말부터 먼저 했다.

 시마무라씨에 따르면 마쓰시로대본영에 동원된 인원은 하루 1만명에 이르렀다는 것. 이 가운데 7천명 정도가 일본 현지에서 또는 한반도에서 끌려온 조선인(한인)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일본정부나 많은 사람들은 강제연행이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일본 국내에서는 조선사람들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우니까 도일(渡日)을 많이 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자주도항’(自主渡港), 즉 자유의지에 의해서 일본에 건너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시마무라씨는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대부분 도로건설이나 탄광 등에서 부역을 해야만 했고,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모집했지만 방법은 ‘강제’적으로 이뤄진 ‘강제연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마무라씨는 “학생들에게 이 지하호를 파는 과정에 왜 조선인이 강제동원돼야만 했는지 등을 알리려고 한다. 또한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사고를 당하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는 많지만 확실한 숫자를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시마무라씨는 이곳에서 인간의 생명의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전쟁의 비극을 어린 학생들에게 알리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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