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승생악의 일제 흔적들 ①베일 벗는 지하진지
한라산
고지대 최후의 저항 진지
한라일보 : 200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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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어승생악 대형 갱도진지 내부. 총연장 86m에 이르는 이 갱도진지는 내부구조 등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다가 이번 탐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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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연장 310여m 대형 갱도진지 구축
어승생악 정상부 연결 시도 흔적도
탐사단은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및 섯알오름·송악산에 이어 한라산 어승생악 일대 집중탐사에 나섰다. 어승생악은 제주해안과 오름에 구축한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에
대비한 최후의 저항진지이자, 58군사령부 주력부대의 주둔지로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어승생악 일대의 일본군 군사시설은 정상부의 토치카 시설 등을
제외하고 그 실체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실정이다. 어승생악 일대 탐사에는 한라산연구소 신용만 연구원과 당시 실제로 이 곳에서 굴을 팠던
고석돈씨(82·북제주군 애월읍 광령리)가 동행,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어승생악의 대형 지하 갱도진지는 남서사면 계곡
능선에 위치해 있다. 8부 능선쯤 되는 지점으로 계곡을 사이에 2개의 지하 갱도진지가 비스듬히 마주하고 있다.
어리목광장에서
아스팔트 진입도로를 따라 2백m쯤 내려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작은 계곡이 나타난다.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도중에 흐르는 물을 가두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물통시설과 취사장으로 추정되는 석축구조물을 볼 수 있다. 물통시설은 각각 220㎝×210㎝, 1m×1m 내외 크기 2개가 확인된다.
이러한 물통시설은 일본군들의 주둔 당시 사용한 흔적들이다. 이후에는 4·3당시에도 계속해서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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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승생악 지하갱도 진지 내부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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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장은 높이 80㎝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고, 돌담은 6단 정도로 쌓여 있다. 한라산연구소 신용만 연구원은 이에대해 취사장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는 검게
탄 숯을 볼 수 있고 녹이 슨 철판도 남아 있다.
취사장을 뒤로 하고 10여분 남짓 올라갔을까. 오른쪽으로 교통호가 길게 이어진
능선 위에 지하 갱도진지의 입구가 나타났다. 이 갱도진지 입구는 너비가 1백60㎝ 정도이며, 무너진 상태의 입구 높이는 60㎝ 정도다(도면
2). 이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주출입통로가 이어졌다. 출입통로는 폭이 1백80㎝, 높이 2m, 길이는 19m 정도로 파악됐다. 그
통로를 따라 들어가자 오른쪽으로 길이 15m 정도의 갱도가 이어졌다. 갱도 끝부분은 무너져 있어 더 이상은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내부에는
2개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또한 구축 당시 썼던 갱목도 볼 수 있다. 수많은 박쥐들이 예기치 않은 탐사단의 방문에 놀라 정신없이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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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도진지앞에 구축된
교통호. | |
이 지하 갱도진지는 총연장이
86m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함몰 이후 부분은 확인이 안돼 지하진지의 규모는 더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탐사단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맞은 편 능선 위에 있는 대형 지하 갱도진지다. 이제껏 그 내부구조 등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기에 탐사단은 아연 긴장했다. 입구는 검붉은 송이층이 무너져 내려 매우 좁았다. 안전모와 조명을 갖추고 그 입구를 통해 마치
썰매타듯이 미끄러지면서 내부로 들어갔지만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탐사에 동행한 고석돈씨는 이 지하 갱도진지 근처에서 굴을
팠던 기억을 생생히 풀어냈다. 고씨에 따르면 이 근처에 3개의 지하갱도가 있었고, 자신은 흙과 송이를 퍼 나르면서 큰 돌이 나오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또 동굴은 서로 통하도록 연결돼 있었고 어승생악 정상까지 뚫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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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승생악 갱도진지 안에서 탐사단원들이 내부구조를 살펴보고
있다. | |
탐사단은 정확한 지하진지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10월 24일 2차 조사에 나섰다.
조사결과 내부로 통하는 출입통로는 세 곳으로 밝혀졌다(도면 1).
출입통로 폭은 각각 대략 2m, 높이 2백10㎝, 길이는 30m 내외로 비슷하다. 가운데 출입구를 제외하고 좌우 양쪽은 송이층이 무너져 내려
입구가 막혀 있는 상태다. 내부는 좌우로 이어진 주통로(길이 57m) 양쪽으로 5개의 공간이 있고, 다시 또 소형공간 3곳을 구축해 놓았다. 맨
안쪽 공간에는 위쪽으로 향하도록 공사를 하다만 흔적이 나타난다. 어승생악 정상부와 연결시키기 위한 시도로 여겨진다.
한라산연구소
신용만 연구원은 이 대형 지하진지에 대해 “한라산의 고지대에 위치한 지하진지로서 일본군이 어승생악 전체를 요새화 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어승생악의 대형 지하진지는 일본군이 본토결전의 장소로서 제주섬을 요새화하기 위해 혈안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 무고한
도민들의 고난과 고통이 뒤따랐다. 어승생악 진지구축에 동원된 사람들의 증언에 비춰볼 때 더 많은 지하 갱도진지 등 일본군 관련 시설이 분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따라 당시 동원됐던 사람들에 대한 증언채록과 관련자료 등을 토대로 58군 사령부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별취재팀=윤보석기자(팀장·사회부장)이윤형기자(편집부
차장)표성준기자(정치부)이승철기자(사진부)
[인터뷰]“해방된 줄도 모르고 굴만
팠어”
조선인 일본군 징병1기 고석돈씨
1944년
조선인으로는 처음 1기로 일본군에 징집됐던 고석돈씨(82·북군 애월읍 광령리)는 50여년만에 본보 탐사단과 함께 어리목광장 및 어승생악 일대를
찾았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에 강제징집돼 어승생악 일대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 현장이어서 고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고씨는 이곳에서 해방된 줄도 모르고 지하 갱도진지를 파는 일에 죽도록 매달렸다고 한다.
만 20세가 되던
지난 1944년에 징병된 고씨는 제주도내 일본군 군사기지에서 갱도진지 구축작업 등에 동원됐다.
애월읍 광령리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고씨는 1943년에 구엄보통학교에서 연성훈련을 받고 1944년 12월(음력)에 소집영장을 받았다. 이어 일본군 한 중대에 편성돼 농업학교와
명도암을 거쳐 모슬포 군산 부근에서 1개월 반 가량 노동하다 45년 3월쯤 한라산 어승생악에 도착했다. 이 때부터 고씨는 마을에서 같이 징병됐던
12명과 헤어져 홀로 남게 됐다.
당시 주먹밥 1개와 국 한그릇으로 끼니를 때웠다는 고씨는 어승생악 갱도진지 구축에 동원됐던
경험을 고통스럽게 묘사했다.
“휴일 없이 그자 일만했어. 밤에 들어강 판 사람들 나오면 또 낮이 들어가. 그거 한 일주일에 한번씩
교대하거든. 한 일주일 밤일 하면은 또 낮일 해난 사람이 또 한 일주일 들어가. 게난 이 밤일을 죽장 하면은 사람이 핏기가 원 없는
거더구만.”
고씨는 해방된 줄도 모르고 어승생악에서 굴을 파는 작업에 동원됐다. 그러다가 며칠간 제대로 된 밥을 주는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해방은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 며칠 후에야 연병장(정뜨르비행장)에서 중대장으로부터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군들은
한국인의 복수가 두려워 연합군에 항복한 뒤에도 민간인들은 물론 일군에 징병된 한국인들에게도 해방소식을 철저히 숨겼다는
것이다.
고씨는 어승생악 갱도진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과 탄약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한다. 숙소는 어리목광장과 그 아래쪽에
천막을 쳐놓고 15∼20명이 함께 생활했다고 증언했다.
고씨는 당시 중노동은 물론 폭행에도 시달려야 했다. 중대에는 같은 계급의
일본 군인 몇몇이 함께 하며 같은 숙소에서 자고 노동했지만 우리말을 쓰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