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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현장’일제전적지를 가다 7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2. 23.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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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어승생악의 일제 흔적들 ②58군사령부와 어승생
토치카 등 견고한 산정요새 구축


한라일보 : 2005. 11.17

▲일본군이 구축한 한라산 어승생악 정상의 콘크리트 토치카 시설로 내부에서 밖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1945년 4월 15일, 일본방위총사령부는 제주도 방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린다. 제58군사령부(사령관 노부루 도야마 중장) 신설과 그에따른 대규모 병력의 증강이다. 이후 제58군사령부는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제주도 최고 지휘부 역할을 했다. 제58군사령부 신설은 표면적으로는 제주도 방비가 주목적이었지만 그 궁극적 목표는 일본토 사수를 위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휘하에는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독립혼성 제108여단 등을 두고 본토결전에 대비했다. 58군 신설을 계기로 일본토의 부대와 만주의 관동군 등을 포함, 종전 무렵 제주에는 7만4천여명에 이르는 대병력이 집결한다. 1944년까지만 해도 제주도 수비병력은 2백여명에 불과했다. 1945년 1월까지도 1천여명에 지나지 않았음을 볼 때 단기간에 대규모 병력이 증강됐음을 알 수 있다.

 그 해 6월 25일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자 본토결전의 시기는 단지 미군의 선택에 좌우되는 문제였다. 이에따라 7월 4일 제58군 사령부 주력부대는 한라산 어승생악으로 이동, 이 일대를 복곽진지로 요새화 하기 시작한다. 복곽(複廓)진지란 최후의 저항진지를 말한다. 제58군은 왜 어승생악을 최후의 저항진지로서 견고한 토치카와 지하 갱도진지, 참호 등을 구축했을까.

 표고 1,169m의 어승생악 정상. 탁 트인 조망이 단연 압권이다. 이 곳에 서면 제주시가지 뿐 아니라 조천·애월·한림읍 지역이 잡힐듯이 다가선다. 이 곳만 장악하면 제주 동·서북부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훤히 내다보인다. 한눈에도 전략적 요충지임을 실감할 수 있다.

 제주도를 옥쇄(玉碎)의 섬, 즉 제2의 오키나와로 작정한 일본군이 이곳을 최후의 저항진지로 삼은 이유중의 하나가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다. 어승생악과 한라산을 무대로 게릴라전을 통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까지 저항하면서 미군의 일본토 공격을 늦추는 시간벌기용 지연전술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어승생악 남동사면의 지하 갱도진지와 그 내부를 조사하는 탐사단(사진 아래).
 어승생악 정상부에는 견고하게 버티고 선 토치카 시설이 잘 남아 있다. 정상부 동북쪽과 서북쪽에 30여m 거리를 두고 있는 2개의 콘크리트 토치카 시설은 내부에서 밖을 관측할 수 있는 구조다. 구축 당시에는 서로 연결돼 있었으나 지금은 함몰된 상태라 확인할 수 없다. 일본군이 항복한 뒤에 미군이 폭파시키려고 했으나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져 실패했다고 한다. 이 토치카 시설은 어승생악 허리의 지하 갱도진지와도 연결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 당시 동원됐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일본군은 정상부 뿐 아니라 오름허리에도 갱도진지를 구축했다.

 어승생악 남동사면에는 일직선으로 돼 있는 지하 갱도시설이 숨겨져 있다. 이 지하 갱도진지의 총 길이는 35m 정도 규모다. 특이한 것은 입구에서부터 11m 지점까지는 견고한 콘크리트로, 나머지 24m 정도는 그냥 암반층을 뚫은채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지하 갱도진지 구축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다.

 콘크리트가 끝나는 지점의 폭은 370㎝, 높이는 220㎝에 이른다. 이 갱도시설은 전체적으로는 위를 향하도록 경사를 이루고 있다. 아마도 정상부와 연결하기 위한 시도로 여겨지나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이와 관련 흥미를 끄는 것이 갱도진지 위에 나 있는 커다란 구덩이다. 직경이 680㎝ 정도에 이르고 깊이가 4m 정도인 이 구덩이는 갱도진지 입구에서 48m 정도 올라간 지점에 형성돼 있다.

 경사도와 길이를 고려할 때 정상부로 갱도시설을 구축해가다 함몰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지하 갱도진지 입구는 돌을 쌓아 올려 방어벽을 구축하고 교통호 시설을 만들었다.

▲지하 갱도진지 입구와 교통호 시설(사진 위). 콘크리트 토치카 시설 내부
 또 하나 관심을 모으는 것은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뒤 1백여m 지점에 있는 움막 형태의 작은 동굴이다. 내부를 자갈과 흙을 이용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형태다. 내부 밑둘레가 930㎝, 높이 175㎝인 이 동굴은 바깥에서는 자연스런 지형물로 보일 정도로 감쪽 같다.

 이 동굴의 용도는 4·3당시는 은신처로 이용됐고, 4·3이전에는 일본군도 이 시설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든 시기와 정확한 용도 등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숯을 굽기 위한 가마시설과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어리목광장에서 탐라계곡 쪽으로 나 있는 도수로를 따라 1m정도 가다보면 족은두레 능선상의 2곳에서 교통호와 참호 등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어승생악과 어리목광장 일대의 요새화 작업은 58군 주력부대가 이동하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어승생악 지하 갱도진지를 파는 일에 동원됐던 고석돈씨(82·북제주군 애월읍 광령리)에 따르면 이 곳으로 오기전에 이미 대규모의 병력과 탄약 등 군수물자가 집결해 있었고,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어리목광장 일대는 탄약이 어승생오름 만큼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이 며칠만 늦었더라면 제주도는 그야말로 ‘옥쇄의 섬’이 될 수도 있었다. 어승생악 일대의 다양한 군사시설들은 일본군의 무모하고 치밀한 계획을 보여주는 역사현장이다./특별취재팀



[전문가 리포트]‘결7호작전’의 총집결지

 1945년 4월부터 어승생악은 일본군 제58군 사령부에 의해 전략상 전투시 지휘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복곽진지로서 구축되었다. 사령부는 제주시 구농고자리(현 전농로 북쪽 주택가)에 있었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해안방어에 한계가 있음을 직시하여 이 곳으로 사령부가 이전되고 제주도 전역의 전투를 지휘하면서 마지막에는 최후의 저항 보루로 삼으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종전 마지막까지 어승생악에 주둔했던 부대는 제96사단 독립고사포 제59중대로서 배치인원은 120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어승생악은 자연적 천연요새임에 틀림없다. 맑은 날 오름정상에 올라 사방을 보면 오른쪽으로는 성산 일출봉과 왼쪽으로는 모슬포 산방산까지를 관측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제주 연안으로 들어오는 해군 함대는 물론이고, 육상전이 전개되더라도 제주 모든 오름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육상전의 상황 파악에 유리한 위치이다. 또한 어승생악과 연결된 한라산 전체가 방어진지가 되어 지구전이 펼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지리적 조건이 갖춰진 장소이다.

 결국 어승생악의 지휘본부는 제주도 결전7호 작전(일본군 작전 암호명)의 총집결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알뜨르, 정뜨르, 진뜨르 비행장이 한 눈에 보이고 모든 오름(특히 서부지역 오름)의 방어진지를 선두지휘할 수 있으며, 가장 험난한 한라산 중턱에서 최후의 일전을 모색할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황석규/제주대강사·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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