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주년 3.1절입니다. 벌써 1세기 가까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국내사회나 세계는 많이 변했고 변해가고 있지만 한일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옛 식민통치시절을 그리워하고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여전히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올바른 한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어떻게 대응해나가야 할 지 참으로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19년 당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운동의 의의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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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펴는 한편, 민족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침탈의 강화로 전체 조선민족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식민통치 10년에 이르는 동안 일제는 회사령,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경제적 수탈이 극에 달했다. 이에 자본가·농민·노동자 등 모든 사회구성 계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겪으면서 그들의 정치·사회의식이 급격히 높아져 갔다. 이 가운데 미국대통령 윌슨이 전후처리를 위해 <14개조평화원칙>을 발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이 기회를 이용한 지식인·종교인들이 불길을 댕기자 항일민족운동은 삽시간에 거족적인 운동으로 번져나가게 됐다.
1919년 손병희를 대표로 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적 인사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 모인 가운데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당했다. 파고다 공원에서는 5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 시위에 나섰다. 이들의 시위행렬에 수만의 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서울시내는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게 되고, 만세운동은 삽시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오후6시 진남포·선천·안주·의주·원산·함흥·대구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음날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 비무장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 군중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부상·투옥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불에 타기도 했다.(일본측 발표)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결과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끝나고 보다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상해의 임시정부탄생,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촉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 배영排英운동인 제1차<사타그라하>운동, 이집트의 반 英 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중동지역의 민족운동을 촉진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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