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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다리 이름을 알면 역사가 보인다

세상보기---------/현대사회 흐름

by 자청비 2005. 9. 30.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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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서울에는 청계천과 14개의 지천에 약 200여 개의 다리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 이름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다리는 80여 개 정도였다. 요즘에도 쓰는 광교, 장교동, 수표동 하는 지명은 바로 그때의 다리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청계천 본류만 해도 태평로 부근에서 중랑천 합류지점까지 모전교, 대광통교(광교), 장통교, 수표교, 하랑교, 효경교(새경다리), 태평교(마천교·오교), 오간수교,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으며, 모두 뛰어난 조형미와 역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청계천 본류의 다리들은 각기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다리 모퉁이에 가게가 있었다는 모전다리, 도성 안의 가장 넓은 다리로 대보름에 다리밟기의 풍습이 성행했던 광통교, 개화기에 유대치가 살았다는 장통방의 장통교, 임금이 자주 건너다니고 정월 연날리기의 중심이었던 수표교, 한양 도성의 일부로 임꺽정이 달아난 통로라는 오간수교 등은 도성 안의 유명한 다리들이었다. 

 

이 다리들 중 오간수문다리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그 밖의 다리들은 1958년부터 78년까지 광교에서 마장동 사이 청계천이 시멘트 콘크리트로 덮이면서 모두 사라졌다. 오직 수표교만이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살아 남았고 광통교는 제자리에 남았으나 찻길 아래 시멘트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짓눌려 있다. 청계천 주변의 다리중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통교(光通橋)=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대광통교,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광통교, 「수선전도」에서는 대광교(大廣橋) 등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같은 다리를 나타내는 말이며, 일상적으로 대광교 혹은 광교라고 불러왔다.


이 다리에 놓여진 돌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황화방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고 당초 묘에 썼던 돌들을 옮겨 다리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였다. 왕비의 묘에서 잘 다듬어진 돌들을 다리를 건설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조선초기의 정치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에게 넘겨 주려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는 사건인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다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당시 이방원의 강씨에 대한 미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광교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많은 상가들이 있어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즉 닭과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대나무를 파는 가게, 갓을 파는 가게, 부인의 머리 장식을 파는 가게, 부인들의 패물과 가락지 등을 파는 가게, 신발을 파는 가게,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 가게, 칠 목기와 장롱을 파는 가게, 잔치 때 그릇을 세 놓는 가게, 채소를 파는 가게, 솜을 파는 가게, 말총·가죽·초·실·휴지·책 등 잡화를 파는 가게, 말안장·등자·굴레 등을 파는 가게, 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항상 광통교 주위에 모여들어 생필품을 팔고 사곤 하였다.

 

1958년 광통교를 복개한 이후 다리의 돌에 새겨진 문양을 볼 수는 없지만 매우 정교한 구름무늬와 당초(唐草)무늬, 그리고 한가운데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에 관을 쓴 신장상(神將像)을 돋을새김한 돌들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문양의 돌을 복개된 청계천 내부로 들어가면 아직도 그래도 남아있어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조흥은행 앞에 옛다리를 축소복원한 모형이 있다.

 

◇장통교(長通橋)=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長通坊)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하여 장창교(長倉橋)라고 불렀고 달리 장찻골다리라고도 불렀으며, 장통교를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다.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의 8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내리는 창동천과 회현동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소광통교에서 만나고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하여져 이 다리 앞에서 청계천의 본 물줄기와 합하여 진다. 따라서 장통교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삼각주를 이루어 넓은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며,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인으로서 개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劉大致)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었다.

 

◇수표교(水標橋)=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사이 청계천 위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세종 2년(1420)에 놓았으며 당시는 근처에 말을 매매하던 마전(馬廛)이 있어 마전교라고도 불렸다. 영조 36년(1760)에 하천 바닥을 파내고 수표교 돌기둥에 '경진지평(庚辰地平)' 네자를 새겨 준천(濬川)의 표준을 삼고 또 따로 수표석(水標石)을 세워 장마철에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수시로 적어 홍수에 대비하였으며, 수표교란 이 수표석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현재 장충단공원 내에 보존되어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같이 놓여 있던 수표석주(手標石柱)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청량리 세종기념회관 뜰 안으로 옮겨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표교 건너에 왕의 영정을 모셔 놓았던 영희전(永禧殿)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들이 설날·한식·단오·추석·동짓날·섣달 그믐 등 여러 차례 이 다리를 건너 왕래하곤 하였다. 오늘날 장충동에 옮겨져 있는 수표교를 보면 매끈한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엮어 놓았고, 돌난간도 아름답게 꾸며 놓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다리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자연재해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던 도성 사람들에게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대피하도록 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한 다리라는 점에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 다리와 얽힌 이야기로는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장통방에 있던 여염집에서 문 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으로 불러 들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오간수교(五間水橋)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을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라 불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 이 다리는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마전교와 오간수다리 사이에는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하상을 준설하고 여기에서 나온 흙들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다.

 

◇영도교=영도교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 영월로 귀양갈 때 아내 송비(宋妃)와 이별했던 장소다. ‘영영 건넌다리’ 등으로 불린 이유다. 청계천 다리를 소재로 한 김별아씨의 첫번째 장편소설 ‘영영 이별 영 이별’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하랑교=중구 입정동(笠井洞)과 종로구 장사동(長沙洞)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조선시대의 다리를 이번에 복원했다. 다리 근처에 하랑위(河浪尉)의 집이 있어 하랑교라 하였고 다리 근처에 화류장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어 화류교(樺榴橋)로 부르던 것이 변하여 하리굣다리·하교(河橋)·화교(花橋)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효경교(새경다리·세운교)=다리 이름은 세운상가에서 딴 것이다. 세운교가 세워진 장소는 조선시대 효경교(孝經橋)가 있던 자리이다. 이 근처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맹교(盲橋)·소경다리라고도 하였는데, 세운상가 옆 아세아전자상가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계천복원추진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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