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제111사단 주둔지
⑥가마오름 갱도와 평화박물관
거대 지하갱도 구축과정 ‘생생’
한라일보 : 2006.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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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오름 갱도를 활용한 평화박물관 전경.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 |
구조·규모면에서 다른 갱도 압도…“군사시설 역사교과서 수록 검토를”
가마오름은 제주섬에서 가장 먼저
갱도구축이 시작된 곳으로 알려진다. 일부 증언에서는 알뜨르비행장 건설과 맞물려 1935년에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당시는 일본제국주의가
중국 난징과 상하이 폭격을 위해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확장을 한창 서두르던 무렵이다.
이로 미뤄 가마오름 갱도는 알뜨르비행장 건설과
일제의 중국 폭격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제주섬과 일본토의 전후 사정 및 일본군의 제주배치 상황을 보면 이러한
증언은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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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오름 남동사면의 갱도. 깎여져 나간 오름사면에 갱도입구 3곳이 나란히 드러나
보인다. | |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중국폭격을 위한 기지로 활용됐다. 이 곳에서 난징공습은 36회, 연 6백기, 투하폭탄 총계는 3백톤에 이를 정도로 알뜨르비행장은 일제의
중국대륙을 위한 전략거점이었다.
이후 한동안 제주섬은 폭풍전야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다가 제주섬의 전략적 중요성이 다시 부상된
것은 1944년 중반이다. 이 시기는 일본이 국가의 유지상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전시국방경계선인 ‘절대국방권’(絶팲國防圈)이 무너진 직후다.
이후 그해 7월 사이판섬이 함락되고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대본영은 일본 본토결전에 대비해서 주요시설의 지하화를 서두른다. 일본 내부에서도
1944년 하반기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마쓰시로대본영 등 지하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가마오름 갱도구축도 일본토의 요새화 시기와
고려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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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 | |
가마오름
갱도는 구조나 규모면에서 다른 오름의 갱도를 압도한다. 곳곳에 알려지지 않은 갱도가 계속 확인돼 아직도 정확한 규모·길이는 오리무중이다. 본보
특별취재팀도 지난 3월 18일과 이달 8일, 그리고 15일 이 곳에 대한 조사에서 대형갱도 3곳을 추가 확인했다.
특별취재팀이
확인한 갱도는 가마오름 남서사면 3부 능선과 남동사면 1부 능선 단애면에 위치한다.
남서사면 3부능선의 갱도(도면)는 주통로의
길이가 1백m 정도에 이른다. 옆으로 뻗은 갱도와 공간 등을 포함할 경우 1백50m정도 된다. 갱도 앞에는 8m 정도의 교통호가 나 있고
6.5m 길이의 갱도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좌우로 10m 정도의 통로가 사각형을 이루면서 주통로와 만나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내부가 쉽게
노출되지 않고, 또 외부로부터의 직접적인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의도다. 갱도 내부에는 크고작은 공간 3개가 마련돼 있고 벽에는 등잔을 놓기
위한 홈이 일정 간격으로 나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수직환풍구도 확인된다. 수직환풍구로 이어진 갱도는 폭이 90cm 정도로 좁은데다 45도 정도
경사진 통로에 계단 20여개 정도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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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가마오름 탐사에서 지하갱도를 실측하는
취재팀. | |
남동사면의 갱도는 깎여져 나간
오름사면에 있다. 이 곳의 갱도 입구 네 곳 가운데 두번째·세번째 입구는 서로 연결돼 있다. 이 갱도는 길이가 2백m 정도인 미로형 구조로 돼
있다.
현재 가마오름에는 지하갱도를 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한 평화박물관(관장 이영근)이 만들어져 있다. 지하갱도 공개구간은
3백m다. 평화박물관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구축한 지하갱도를 활용한 첫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04년 2월
개관돼 올 3월말까지 30만명이 찾을 정도로 점차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학생층의 증가하면서 일제의 침략야욕을 보여주는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일본인 단체관광객들도 이 곳을 자주 찾고 있다.
하지만 사립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시설의 미흡과
지하갱도의 보존관리 우려, 정확한 고증 등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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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물자 등을 운반했던 구루마, 갱도 내부를 밝히는데 사용했던 벽꽂이등, 한쪽이 잘려나간 곡괭이,
활주로를 다지는데 썼던 모리.(사진
위로부터 | |
이 곳에는 영상관과 전시관 등이 마련돼 있다. 특히 당시 갱도 구축 과정등을 파악하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양쪽으로 손잡이가 달린 쇳덩이로 만든 ‘모리’는 손으로 활주로를 다지는데 썼던 기구다. 알뜨르비행장이나
정드르비행장을 만드는데 사용한 기구들로 많은 인력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곡괭이는 한쪽 끝이 없다. 1∼2m 좁은 갱도안에서 작업하기 좋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벽꽂이등은 갱도를 파는데 썼던 일종의 간이 조명기구다. 긴 침을 이용하여 땅굴벽에 꽂아 불을 밝혀 놓고 작업을 하고는
벽 홈같은데 등을 놓고 다시 벽꽂이등을 꽂아 넣고 작업하면서 갱도를 파들어갔다.
이처럼 가마오름 지하갱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군사시설의 구축과정과 절체절명의 전운이 감돌았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만큼 문화재 지정 등 당국의 보존노력도
절실하다.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제주섬에 구축한 지하갱도 등 거대 군사시설들을 역사교과서에 수록하는 작업도
검토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옹포에서 군수물자 수송해 와”
가마오름 평화박물관
이영근관장
가마오름
지하갱도는 평화박물관 이영근 관장(53·사진)이 그동안 모아온 각종 자료들과 갱도를 활용한 박물관을 설립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이 관장의 부친
이성찬씨(1921년생)가 21세(1943년 무렵)에 당시 한림 옹포항에서 마차로 군량미를 가마오름까지 수송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가마오름 갱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고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게 됐다. 이 관장에 따르면 부친은 당시 가마오름에서 일본군들이 굴을 파고 살고 있는 것을 자주
봤다고 한다.
이 관장은 “옹포에서 가마오름으로 옮겨진 군수물자는 애월 광령이나 안덕 감산리 월라봉 등지로 배분했다”며, “안덕
화순항으로는 목재 등을 들여왔다”고 설명했다. 또 “가마오름 갱도의 갱목들은 청수리 주민들은 물론이고 무릉·고산사람들까지 와서 마차에 실어서
갔는데 그걸로 집 몇 채를 지을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이 관장은 일본군들의 공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일본군들은 일주일마다
한차례씩 한동네에서 소를 공출했다”는 것. 그런데 일본군들은 “조선 소는 냄새가 난다고 해서 꼴을 먹이고는 소나무에 일주일 정도 매어두면서
일본군들 먹였던 누룽지물을 주면 풀냄새가 안난다고…, 그렇게 도살하고 잡아먹었다”고 덧붙였다.
이 관장은 또한 “당시 14세
이상의 남녀는 지금 청수리 명이동 공터에서 제식훈련 등을 했는데 그때 여자들한테 훈련하기에 좋게 광목을 줘서 잘라 입으라고 시켰다”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 입기 시작한 것이 ‘몸빼’라고 설명했다. 일본놈들이 군사훈련을 시키려고 만들어 입기 시작한 건데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입고 있다는
아픈 지적이다.
이 관장은 그러면서 박물관 운영에 대한 어려움도 털어놨다. 제일 급선무가 비가 올때 학생들한테 설명해줄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 이 관장은 또 지역별로 특성있게 갱도진지 등 전쟁유적지를 묶어서 역사교훈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이러한 박물관을 개인이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이 관장은 “도에서 하겠다면 욕심 없습니다.
평화의 섬에 걸맞게 국제·세계화시대에 부응하려면 지자체에서라도 나서고 정부에서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