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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 실태 11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5. 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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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제111사단 주둔지 ⑧새신오름 지하갱도
예상치 못한 대규모 갱도에 ‘깜짝’


한라일보 : 2006. 05.04

▲입구가 양쪽으로 나 있는 새신오름 지하갱도(사진 위). 조사를 끝낸 취재팀이 갱도 밖으로 나오고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일본군 243연대 ‘주저항진지’ 구축…추후 정밀조사·보호대책 뒤따라야

 다시 새신오름이다. 새신오름의 지하갱도는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다. 본보 특별취재팀이 확인한 갱도 길이만도 600m 가까이 돼 입구가 막힌 곳까지 포함할 경우 훨씬 늘어날 것은 불보듯 뻔하다. 인근 가마오름의 경우 기존에 알려진 1천200여m 길이에 특별취재팀이 추가로 확인한 400여m를 포함하면 1천600여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내 갱도 중 최장으로 꼽힌다. 아마도 새신오름의 경우는 이에 못미치더라도 제주도내에서 손꼽을 만한 규모의 갱도가 구축된 것만은 사실이다.

 새신오름 갱도는 남쪽사면을 중심으로 남서·남동사면에 집중 분포한다. 오름 사면에는 방목중인 소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철조망이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다. 오름사면 1부 능선과 정상 못미친 부근에 가로·세로로 철조망을 세워 놓았다. 정상 부근 8부 능선 지점의 지하갱도는 대부분 철조망 안에 분포한다.

▲<도면 1>과 <도면 2>
 새신오름은 비교적 낮은 오름이지만 서남부 해안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해안가인 한경면 고산리까지 거리는 6km쯤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최정예인 제111사단 예하 243연대는 가마오름·새신오름 일대에 주둔했다. 새신오름에는 기갑부대가, 후방인 원물오름·당오름에는 제111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사령부주둔지 맞은편 도너리오름에는 포병부대가 포진한 형태다.

 새신오름의 갱도는 길이가 10여m 내외의 짧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입구가 복수로 나 있다.

 8부 능선쯤의 지하갱도<도면 1>는 총길이가 150m쯤 된다. 정남방향으로 주 입구가 나 있으며 16m 오른쪽으로 또다른 입구가 있다. 갱도 폭은 1m∼150cm, 높이는 130cm에서 최고 2m에 이른다. 입구 부분은 가파르게 경사져 있고 중간에 송이층이 무너져 공간이 넓게 형성된 곳도 나타난다. 경사는 주 입구를 따라 60여m 지점까지 형성돼 있다. 이 지점부터 주 통로는 암반으로 돼 있고, 갱도는 정상쪽으로 관통된 형태다.

 특별취재팀의 관심을 모은 것은 갱도 깊숙한 이 곳부터 옹기 등 생활유물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옹기는 대부분 파편형태로 뒹굴고 있다. 이러한 생활유물은 1948년 발생한 ‘4·3’ 당시 토벌대를 피해 이곳에 숨어든 주민들의 흔적들로 추정된다. 갱도 내부의 광경은 당시 한바탕 난리 이후 시간이 정지한 듯 적막감이 흐른다.

 이 일대는 예부터 가마집산지로 다양한 옹기들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갱도속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1,100℃의 뜨거운 가마속에서 구워낸 옹기들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는지도 모른다. 출구로 향하는 갱도내부에는 큰 바위가 있어 진입을 가로막고 공간도 매우 좁다.

▲새신오름 지하갱도(도면 1). 내부에 남아있는 옹기 파편들.
 또하나의 대형갱도<도면 2>는 정서 방향에 있다. 총길이는 145m 정도, 높이 130cm∼170cm, 너비는 80cm∼130cm로 갱도형태가 뚜렷하다. 이 갱도의 또다른 입구는 오른쪽 방향 27m 지점에 나 있다. 갱도 바닥에는 침목을 깔았던 흔적도 볼 수 있다.

 이 일대에는 또 길이 130m 가량의 대형갱도도 확인된다. 이 갱도는 직선형 입구와 6m쯤 거리에 또하나의 입구가 있다. 입구는 모두 4곳으로 남남서 방향으로 나 있다. 이외에도 40m 길의의 직선형 갱도도 확인된다. 이 갱도 또한 반대편에 입구가 있고 정상부 쪽으로 뚫려 있다. 벽면에는 곡괭이 자국이 선명하다. 입구는 폭 1m 높이 120cm, 갱도 내부 역시 폭은 1m∼110cm로 좁고 높이는 140cm∼170cm 정도다. 축사가 있는 오름사면에도 2∼3곳의 갱도흔적을 볼 수 있으나 사면이 깎여져 나가면서 함몰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태평양전쟁 말기 원물오름·당오름 일대에 포진한 제111사단 사령부는 이 곳 중산간 일대에 거점이 되는 ‘주저항진지’를 구축, 제주서남부 해안으로 예상되는 미군의 상륙에 대비했다.

 아마도 일본의 패망이 좀 더 늦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예상대로 미군이 상륙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해안가에 분포한 ‘위장진지’ ‘전진거점진지’에 이어 이러한 ‘주저항진지’는 격렬한 전장터가 된다. 이마저 무너진다면 일본제국주의는 일(日)본토사수를 위해, 그리고 천왕제유지 등 연합군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은 한라산 깊숙한 ‘복곽진지’로 후퇴 최후의 저항을 벌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온 섬이 전쟁터가 되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극적 상황이 전개됐을 것이다.

 새신오름 지하갱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제주섬을 무대로 저질렀던 당시 실상을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현장이다. 더 늦기전에 추후 정밀조사는 물론 적절한 보호대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4·3’과의 연관성을 밝히는 작업도 과제로 대두된다. /특별취재팀

▲새신오름 지하갱도 내부. 벽면과 바닥에 갱목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탐사 포커스]질곡의 역사·恨·아픔 ‘생생’

 새신오름 갱도의 옹기는 이 일대가 가마(窯)의 집산지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제주는 예부터 철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철의 대용으로 다양한 그릇·용기들을 만들어냈다. 그 시기는 고려시대 중기부터 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전통도기(陶器·甕器)는 그야말로 다양하게 제작됐다. 그 종류만도 1백여종이 훨씬 넘는다. 전통도기는 생활속의 다양한 용기에서부터 심지어 악기로까지 활용됐을 정도로 쓰임새가 많았다.

 하지만 도기는 아무데서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주섬 대부분의 토양은 화산회토로 철분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도기 등을 제작하는데 적합하지가 않다. 그런데 제주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도기를 만들 수 있는 점토가 분포한다. 새신오름이 자리한 한경면 산양·조수·고산리, 대정읍 신평·구억리 일대가 도기제작이 성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일대에서 가마작업이 제일 먼저 시작됐다. 이곳에는 7기의 가마(노랑굴)가 현재 남아있다. 제주도 전체적으로 가마터는 40여 곳에 이른다.

 이러한 가마는 1948년 발생한 ‘4·3’ 사건의 와중에 많이 훼손됐다. 마을이 없어지거나, 사람들이 떠나버리면서 그릇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레 가마는 폐요(廢窯)되거나 자연적·인위적 요인에 의해서 점차 훼손되고 잊혀지게 된다. ‘4·3’ 사건 이후엔 다시 가마제작이 반짝 성행했으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옹기의 수요가 줄면서 점차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있다.

 제주섬 어느 곳도 그렇지만 이 일대 역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의 ‘4·3’까지 이어진 질곡의 역사를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한과 아픔이 온전히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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