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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13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6. 8.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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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111사단 주둔지 ⑩녹남봉
평탄지대 오름에 전진거점진지 구축


한라일보 : 2006년 05월 25일

▲녹남봉 정상부 분화구 안쪽에 형성된 갱도내부를 취재팀이 살펴보고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가마오름서 파견된 소대급병력 주둔

오름 관통 60m 길이 갱도 등 10여곳 첫 확인


 마치 마을 뒷산 같은 오름이다. 대정읍 신도1리에 자리한 녹남봉(표고 100.4m)은 그렇게 정겹게 다가온다. 녹남봉이란 이름은 ‘녹낭’(녹나무)이 많았던데서 연유했다. 그래서 한자로는 녹나무를 뜻하는 장목악(樟木岳)·장목봉(樟木峰)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그 많던 녹나무는 지금은 볼 수 없다. 대신에 소나무와 예덕나무 등이 자리를 차지했다. 오름 정상부에는 아담하게 패인 분화구가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분화구가 마치 가마솥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가매창’이라 부른다. 현재 분화구 내에는 복분자와 감나무 등이 심어져 있다.

▲녹남봉 갱도 앞에 교통호가 길게 이어져 있다.
 오름 정상부에 서면 소나무로 시야를 가리긴 하지만 제주섬의 최서단인 수월봉과 최남단인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산방산과 단산·모슬봉이, 북쪽으로는 가마오름 등이 보인다. 녹남봉은 비고가 6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처럼 전망이 탁 트인 것은 제주섬에서 가장 넓은 평원지대에 솟아 있기 때문이다. 사방을 둘러보면 녹남봉 서쪽 해안가 방면으로는 고산평야가 있고, 북동쪽으로는 모동장(毛洞場)의 너른 들녘이 자리한다. 대초원 위에 자리해 있어 ‘낮지만 높은 오름’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입지조건 때문이었을까.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은 이 오름에도 깊은 전쟁의 상흔을 남겨놓았다.

 본보 특별취재팀은 지난 20일 녹남봉에 대한 현장탐사를 통해 60m 이상 되는 관통형 대형갱도 등 10여 곳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도면 1
 녹남봉에 구축된 가장 큰 갱도는 동쪽 사면 7부능선 쯤에 위치한다.<도면 1> 이 갱도는 일직선으로 정상을 향해 파들어갔다. 입구는 높이가 170cm, 폭은 110cm, 갱도 내부는 높이 200cm, 폭이 140cm 정도 된다. 갱도 내부는 진입하자 마자 가로 6m 세로 5m 정도의 공간과 마주친다. 이 공간은 1960년대 무렵 마을주민들이 도로를 포장하기 위해 갱도 내부의 송이를 파내면서 형성됐다.

 갱도는 이곳서부터 약 35m 지점까지는 수평형태를 보이다 가파르게 경사져 있다. 정상부와 관통되게 갱도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정상부 출구는 마을주민들이 막아버려 현재 막혀있다.

 또 다른 갱도는 정북방향 사면 6부능선 쯤에 있다. 총 길이는 30m 정도로 역시 정상부를 향해 파들어갔다. 끝부분은 왼쪽으로 꺾여 있다. 갱도내부 폭은 150cm, 높이는 190cm 정도 된다. 입구 앞쪽으로는 교통호가 8m 정도 나 있다. 이 갱도 라인을 따라 길이 10m 정도의 소형갱도도 자리한다.

▲갱도내부에서 바깥출구를 바라본 모습.
 녹남봉의 그밖의 갱도는 정상부와 분화구 주변에서 확인된다. 길이 12m의 갱도를 비롯 5개의 갱도가 확인됐으나 모두 구축도중에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북서방향의 갱도는 길이가 490cm, 폭 230cm, 깊이 260cm로 장방형 참호가 앞쪽에 나 있어 눈길을 끌었다. 아마도 단순한 갱도보다는 다른 용도로 구축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녹남봉의 대형 갱도는 갱목을 세우는 등 완성된 형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이 패망한 뒤 주민들이 가져다가 집을 짓거나 불을 때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어떤 일본군들이 주둔했을까. 신도 1리 전 노인회장인 변해운씨<현장인터뷰>는 녹남봉의 일본군은 가마오름에서 파견나왔다고 증언한다.

 가마오름은 일본군 최정예부대인 제111사단 예하 243연대본부 주둔지다. 243연대는 가마오름에 연대본부를 두고 새신오름과 굽은오름 일대에 대규모 갱도진지를 구축한 채 탱크 등 중무장 상태로 집중 배치됐다. 녹남봉의 일본군은 3∼4개월 정도 주둔했다는 이야기로 미뤄 가마오름과 새신·굽은오름의 갱도구축이 어느정도 끝난 뒤에 이곳에 투입된 것으로 보인다.

▲녹남봉 정상부에 형성된 갱도 입구와 그 앞쪽에 나있는 장방형 참호.
 그 규모는 갱도구축 실태나 마을주민들의 증언을 비춰볼 때 가마오름에서 1개소대 정도의 병력이 이곳에 파견돼 갱도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파악된다. 미군의 상륙지점으로 예상되는 송악산 일대 해안가와 수월봉 사이의 저지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즉, 녹남봉은 가마·새신·굽은오름 주저항진지의 전방에 위치한 ‘전진거점진지’ 역할을 했다. 일본군 제111사단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전진거점진지인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섬에 주둔한 일본군 배치도인 ‘제58군배비개견도’를 보면 ‘전진거점 진지’는 주로 주저항진지의 전방에 위치했다.

 이처럼 녹남봉의 갱도진지는 가마오름이나 새신오름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일본군 주둔 및 갱도구축 실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곳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다른 오름에 구축된 갱도진지처럼 이 곳 역시 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어서 실태조사가 시급하다.

[현장인터뷰]대정읍 신도1리 변해운씨 “죽지 않으니까 살았지”

 변해운씨(1925년 생·신도1리 1477)는 1944년 봄에 특별연성소 2기생으로 일제에 징집돼서 모슬포 대정국민학교에서 1년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1기생들이 어승생 등지에 노무자로 끌려간 반면 특별연성소 2기생들은 만주로 보내어질 운명이었다. 그렇지만 변해운씨는 해방되던 해 일본군수송선을 타고 만주로 향하다 일본이 패망함에 따라 정박중인 부산에서 천만다행으로 귀향한다. 그 때 집에서는 잔치를 벌이며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했다.

 “녹남봉에는 1개 소대 병력이 주둔했었지. 본부는 가마오름이고 거기서 일본군들이 파견나왔어. 가마오름에는 1년 정도 앞서 일본군들이 왔는데 녹남봉에는 해방되는 해 봄철에 와서 3∼4개월 정도 있었지. 일본군들은 오름 밖에 천막치고 갱도를 직접 팠어.”

 변씨는 녹남봉의 갱도도 갱목을 세우는 등 완성된 형태로 구축됐다며 일본군이 패망후 떠나자 지역주민들이 가져다가 집을 짓고 불을 때는데 썼다고 회상했다. 또 갱목에 썼던 숙대낭(삼나무)은 일본군들이 가져온 것 같다며 당시 제주에는 숙대낭이 많지 않았고 크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소나무는 제주에서 벌목해서 썼다는 것.

 변씨는 “당시 구루마는 한 부락에 1∼2대 정도 있을까 말까 했는데 일본군이 패전 뒤에는 두 집 중에 1대 꼴로 많았어. 당시 신도1리만 2백호 정도 됐지”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특별연성소에서의 훈련에 대해서도 변씨는 당시 훈련받을때 송악산 알뜨르비행장 일대를 견학갔었다며, 지역민들이 강제동원돼 노동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자신 역시 “턱이 내 것이 아니었을 정도”로 죽도록 맞았다는 변씨는 연성훈련은 동기생 40여명이 받은 걸로 기억된다며, 마을에서는 혼자 징집됐다고 덧붙였다. 또 당시 공출도 심해 면화나 절간고구마 보리 등을 강탈 당해 “죽지 않으니까 살았다”고 할 만큼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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