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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12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5. 1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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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111사단 주둔지 ⑨굽은오름
갱목 설치형태 온전히 남아 주목


한라일보 : 2006. 05.11

▲양쪽벽면에 갱목홈이 뚜렷한 굽은오름 갱도 내부. 갱도구축과정 및 구조를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갱도 내부구조·구축형태 파악 가능

조사·연구 중요자료… 보존 필요성


 새신오름에서 대규모 갱도를 확인한 특별취재팀은 굽은오름에도 주목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제111사단 예하 243연대 주둔지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굽은오름(구분오름·拘奔岳·한경면 조수2리 소재·표고 96m·비고 26m)은 새신오름 서쪽 2km 남짓 거리에 있다. 굽은오름이란 이름은 ‘구부러지게 누워있는 개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데서 왔다고 한다. 조수리는 오래전부터 옹기를 굽던 마을이다. 오름 뒤쪽에 물이 있었는데 흙이 붉어서 물도 붉게 비치니까 이 동네를 ‘불그못’, 한자로는 주지동(朱池洞)이라 불렀다. 현재도 가마터가 남아있어 옹기굽던 마을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굽은오름의 또다른 갱도. 입구가 가파르게 경사져 있다.
 마을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은 굽은오름 전체에 갱도를 판 것으로 알려진다.

오름 내부에 대규모 갱도가 구축돼 있다는 이야기다.

 특별취재팀은 지난달 23일과 이달 4일, 9일 등 3차례에 걸쳐 굽은오름에 대한 탐사 및 증언채록에 나섰다. 특별취재팀이 확인한 갱도는 5곳이다. 하지만 갱도입구와 흔적은 20여 곳 정도 된다. 특히 굽은오름 탐사에서는 갱도내부 구조와 갱도의 완성된 형태를 파악하게 해주는 갱도가 확인돼 비상한 관심을 끈다.<도면 1>

 이 갱도는 굽은오름 ‘암메왓’ 지경 사면에 위치한다.

지금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지만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군들이 이 일대에 천막을 치고 숙영을 했다. 갱도는 수평형태로 파들어갔다. 굽은오름의 다른 갱도나 새신오름 갱도의 경우 대부분 입구부분이 가파르게 경사져 있는 것과 비교된다. 갱도의 구조는 ‘에프’(F)형으로 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으며 총연장은 50m 길이다.

▲도면(2)와 도면(1)
하지만 입구쪽 무너진 갱도가 27m 정도 돼 원래는 80m 길이의 갱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갱도는 입구가 폭 215cm, 높이는 무너진 상태서 115cm 정도 된다. 갱도 내부의 폭은 220cm에서 240cm 정도로 넓다. 높이 역시 230cm 정도로 높은 갱도에 속한다.

 무엇보다 취재팀의 시선을 끈 것은 갱도내부 전체에 갱목 설치형태가 원형대로 뚜렷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갱목 홈은 무려 직경이 35cm, 높이는 220cm, 갱목홈 간격은 50cm에 이른다. 갱도 내부 좌우측 벽면 뿐만 아니라, 오른쪽으로 난 공간 좌우 벽면에도 남아있다. 갱목홈은 성인이 들어갈 정도로 깊고 뚜렷하다. 일본군들의 무모함과 치밀함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굽은오름 갱도는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갱도를 구축하는데 소요된 목재수량, 내부 구조 등을 파악하는데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갱도 내부 상황만을 보면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은 50cm 간격으로 직경 35cm에 2m 이상 되는 거대한 갱목을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벽면에 세웠던 갱목 수만도 단순계산만으로 무려 3백20개나 된다.

▲특별취재팀이 갱목 흔적이 뚜렷한 굽은오름 갱도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바닥과 천장을 포함할 경우 엄청난 갱목이 소요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갱목이 한아름이나 됐다”는 이 마을 노인회장 박성린씨의 표현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처럼 큰 갱목은 일본군 제111사단이 중국 만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수송해 온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다른 갱도는 오름 4부 능선 쯤에 위치한다.<도면 2> 이 갱도는 총길이가 40m 규모다. 입구가 45도 정도로 가파르게 경사져 있어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갱도의 내부 폭은 120cm에서 135cm, 높이는 170cm를 보인다. 이외에도 20m 길이의 갱도 2곳이 더 확인된다.

 오름 남서쪽 경작지 가장자리에서도 갱도가 확인되나 2∼3m 지점부터 쓰레기와 토사 등으로 막혀 있다. 박성린씨에 따르면 이 갱도는 원래 반대편으로 관통됐으나 경작하면서 입구가 막혔다고 한다. 또 오름 정상 부분에도 50m 깊이의 수직굴이 있었으나 자주 소가 빠지는 등 피해가 발생하자 마을주민들이 메워버렸다고 한다.

▲갱도입구 바깥으로 교통호가 길게 나 있다.

 이처럼 굽은오름에서도 많은 갱도의 실체가 확인된다. 그 이유는 이 일대가 가마오름·새신오름과 함께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제111사단 243연대의 핵심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이 일대에 각종 중무장 화기를 갖춘 막강한 ‘주저항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특히 이 곳은 지금까지 탐사한 갱도 가운데 갱목설치 형태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있어 주목된다. 일정구간도 아닌 갱도전체에 갱목설치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는 경우는 처음 확인됐다. 때문에 조사연구 대상으로서 중요한 가치는 물론 보존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별취재팀


[현장 인터뷰] 조수2리 박성린 노인회장“탱크도 주둔하고 고사포도 설치”

 이 마을에서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박성린씨(74·한경면 조수2리 3755번지)는 이 곳 토박이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는 만 12세 였다. 박씨는 굽은오름을 끼고 있는 이 마을에 일본군들이 주둔한 것은 해방되기 전 해로 기억했다. 일본군이 패전때까지 2년정도 주둔했다는 것.

 “그 때 일본군들은 굽은오름 주변에 철조망을 쳐서 주민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뒤 갱도를 팠어. 갱도 내부는 양쪽에 갱목을 세우고, 갱목이 넘어지지 않게 바닥에 받침목을 댄 뒤 천장에도 갱목을 양쪽으로 이어서 두꺼운 판자를 씌웠지. 갱목은 한아름 될 정도로 컸는데 일본군들이 외부에서 가져왔어. 또 이 곳에서도 소나무 등을 마구 베었어.”

 박씨는 당시 갱도를 파면서 일본군들도 많이 죽었다며 석유뿌리고 불태우는 것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 후 해방되니까 갱목들은 마을주민은 물론 모슬포에서까지 와서 가져다가 집을 지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그러면서 해방되던 해 초에는 중령급으로 보이는 부대장이 가족들을 내쫓고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집을 빼앗아 살았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시 굽은오름 주변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굽은오름에도 탱크가 있었지. 새신오름(기갑부대 주둔)과 가까우니까 왔다갔다 했어. 탱크는 구루마에 싣고 호마가 양쪽에 6마리씩 12마리가 끌기도 하는 광경을 보기도 했지. 한달에 한번 정도는 가마오름과 새신오름의 일본군 간부급들이 이곳에 와서 훈련하기도 했어.”

 또 굽은오름 정상부에는 고사포도 설치됐는데 실제 포사격도 이뤄졌다고 말했다.

 “해방되는 해 봄철로 기억하는데 미군에 쫓겼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신도2리 ‘논깎’ 해안가로 일본군을 수송하던 배가 들어오게 됐어. 그 때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일본군수송선은 ‘논깎’ 해안에서 침몰했지. 당시에 굽은오름과 모슬포에서 포사격을 가하니까 미군비행기는 물러갔어.” 박씨는 당시 배 부서진 잔해가 5년쯤 지난 뒤에도 남아있었다고 회상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공출도 심했다는 박씨는 개인별·동네별로 보리물량을 배정해서 그걸 못하면 일일이 집수색을 하면서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조수2리에서는 목화도 많이 재배했는데, 일본군들은 총기에 쓴다며 목화도 공출해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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