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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18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7. 2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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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사단 주둔지 (14)가시오름의 갱도
갱도·교통호 ‘끊길듯 끊길듯’ 이어져


한라일보 : 2006년 07월 20일

모슬포 일대서 위장진지 성격 유일

미군 공격서 보호위한 지리적 위치


 가시오름(대정읍 동일리 소재·표고 107m, 비고 80여m)은 이름 만큼이나 가시돋친 초목이 많은 오름이다. 특별취재팀으로서는 가시덤불을 헤집고 다니느라 꽤나 애를 먹은 오름으로 기억된다. 가시오름이란 이름은 단순히 가시가 많은 초목 보다는 가시낭(가시나무) 즉, 상수리나무나 물참나무 등 참나무과에 속하는 교목이 많았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한자로는 그 음을 따서 가시악(加時岳·可是岳·加是岳)으로 쓰인다.

 특별취재팀은 지난달 10일과 17일 가시오름에 대한 탐사에 나섰다. 무성한 초목 사이로 많은 교통호 흔적이 확인됐으나 정작 갱도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취재팀이 갱도를 찾은 것은 가시오름 7부 능선 지점이다. 오름사면 송이층을 파고 들어간 갱도는 25m 길이로 정동 방향으로 입구가 나 있다.<도면>

 입구 좌우로는 교통호가 10여m 이상 이어져 있어 눈길을 끈다. 폭 160cm, 높이 170cm 정도의 갱도입구를 따라 내부로 진입하면 직선형으로 뻗다가 왼쪽으로 굴곡진 형태다. 벽에는 곡괭이 자국 등이 선명하고 갱도 끝은 암반으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또 다른 갱도는 가시오름 남남동사면 3부능선 지점에서 찾아냈다. 전체적인 길이는 15m의 소형으로 입구는 두개가 나 있다. 갱도 끝부분은 위로 관통돼 좁은 교통호와 연결된 구조가 눈길을 끈다. 깊이는 370cm 정도로 간단한 사다리를 놓고 바로 위쪽으로 올라가거나 혹은 오름사면의 교통호에서 직접 갱도로 뛰어내리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취재팀은 이곳과 10여m 떨어진 지점에서도 갱도를 찾아냈다. 특이한 것은 갱도와 교통호가 교차로 이어지면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길이는 30여m 정도 . 교통호가 많고 갱도와 중첩돼 나타나는 양상은 가시오름에 파놓은 일본군 군사시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마도 가마오름의 진지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제58군배비개견도 등을 보면 가시오름은 위장진지로 구축됐음을 알 수 있다.

 가시오름 정상부에 올라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가시오름 남동쪽으로는 모슬봉이 지척이고 그 뒤로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이 보인다. 그 너머는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다. 가파도와 국토 최남단인 마라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면 위로 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상념도 잠시 서서히 시선을 서쪽으로 옮기면 수월봉과 당산봉, 녹남봉을 볼 수 있다. 이어 새신오름·이계오름·가마오름·저지오름·느지리오름·갯거리오름·금악 등이 줄을 잇는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오름마다에는 많은 갱도들이 구축돼 있다. 수월봉 해안 특공기지, 당산봉 주저항진지, 녹남봉 전진거점진지, 새신·굽은·가마오름은 일본군 제111사단 243·244연대의 핵심주둔지로 각각 거대한 갱도가 만들어졌다. 송악산과 알뜨르비행장, 모슬봉 역시 해안특공정기지, 고사포진지, 레이더기지 등이 구축돼 있다. 가시오름 정상부에서 보면 제주 서남부 지역의 핵심 군사시설과 진지들이 빙 둘러서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가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이 일대의 핵심 군사시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하에 가시오름에 갱도와 교통호 등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가시오름은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서남부 일대에서는 유일한 위장진지의 성격을 지닌다. 이런 맥락에서 가시오름의 갱도는 미군의 시선을 주요 거점진지나 위장진지로부터 분산시키려는 의도하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진지구축의 실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대정읍 일과리 문공학씨]“하루 평균 10시간씩 죽어라 노역만”

 문공학씨(1921년생·대정읍 일과리·사진)는 부친이 알뜨르비행장 확장공사에 강제동원된 후 1개월 쯤 지나 병이 나자 부친 대신 현장에서 노역을 해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문씨는 1943년∼1944년 겨울철에 동원돼 1945년 4월 무렵까지 18개월 동안 노역에 시달렸다.

 문씨는 “일본군은 ‘진해시설부’ 주관으로 알뜨르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서쪽·남쪽·동쪽 지역 등 세 군데로 구분 공사를 진행했다”며 “당시 강제동원된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했지만 사람으로 취급도 안했다”고 분노했다.

 “당시 강제동원된 사람들은 1백평 정도 되는 함바로 만든 숙소에 2백명 가량이 널판지를 깔고 공동생활을 해야 했어. 그 수는 1천명 정도 됐지. 함바도 처음에는 3동이었다가 나중에는 5동으로 늘어났고 사람들도 대정은 물론 한경·중문지역에서까지 끌어왔어.”

 문씨는 또 “동원된 사람들은 3개월 동안 공사현장과 숙소(함바)를 왔다갔다 하면서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평균 10시간 동안 죽어라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문씨는 이어 알뜨르비행장이 완공된 후 잠자리비행기(아카톰보)로 연습도 하고 탄약고도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잠자리비행기는 격납고 안에 집어넣어 위장했어. 당시만 해도 격납고는 31개 정도로 기억하는데 상모리 산이수동 등 인근 바닷가에서 자갈 등을 많이 가져다 만들었지.”

 뿐만 아니라 알뜨르비행장에는 전투기도 배치됐었다고 증언했다. “알뜨르비행장에서 중국 상하이를 폭격할때는 일본군 ‘물차’가 서림수원지의 물을 떠오면 전투기에 넣고 출격을 했다”는 것. 또 폭격을 위해 출격할때는 전투기가 10여대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가시오름에 대해서도 문씨는 “일본군들이 많은 갱도를 팠다”며 “25년 전 쯤에는 육지에서 60대 남자가 와서 ‘금괴’를 파기 위해 굴(갱도) 안에서 한 20일 쯤 살다가 죽은 일도 있다”고 설명했다. 가시오름 정상부가 평탄하게 된 것은 미군이 레이더기지를 만들기 위해 공사를 하다가 중단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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