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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17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7. 1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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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한일 공동조사
일본군 배치·갱도구축 증언 ‘생생’


한라일보 : 2006. 07.13

 

▲관동군이 주둔했던 한경면 조수2리 소재 굽은오름의 갱도진지.
당시 관동군 본보 취재팀과 공동조사 나서

주둔상황·갱도·무기편제 등 실체접근 관심


태평양전쟁 말기에 제주에 주둔하면서 직접 갱도진지를 판 관동군 출신 일본인이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제주를 방문 본보 특별취재팀과 함께 당시 현장을 답사했다. 중국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근무했던 가미키 사토루씨(神木悟·81·德島縣 阿南市)와 본보 일제전적지 탐사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츠카사키 마사유키씨(일본15년전쟁연구회 연구원)및 다카무라 료헤이 교수(고베 야마테대학) 등은 이 기간 동안 한경면 굽은오름과 가마오름 평화박물관, 어승생악 일대를 둘러봤다. 가미키씨 일행은 6일에는 본사를 찾아 취재진 및 전문가들과 함께 간담회를 가졌다. 이번 제주·일본 공동조사는 지난해 12월 말과 올 3월에 이어 세번째다.

 가미키씨가 소속했던 일본군 제111사단은 언제 제주로 이동했을까.

 제111사단은 제주 주둔 일본군 가운데 가장 최정예부대로 1만2천명의 중무장 병력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만주에서 이동 제주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주둔하면서 미군의 상륙에 대비 최후항전과 옥쇄작전 등을 준비한다.

 가미키씨에 따르면 그가 속한 제111사단 산하 보병 제244연대 제1대대 제3중대는 1945년 3월 20일쯤 동원령에 따라 전시편성이 된다. 부대는 중국 만주 이도구(二道溝)를 출발 목포에 도착하고 4월 11일 목포에서 그 다음날인 12일 제주 산지항으로 상륙한다. 그가 속한 중대병력은 약 2백명 정도. 이 가운데 조선인은 6∼7명으로 기억했다. 조선인은 별도로 집결해서 합류했다고 증언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 가미키씨의 말은 관심을 끈다.

 만주에서의 군생활 당시 부대에는 반드시 여자들이 뒤따라야 했다는 것. 그가 속한 연대에도 따로 건물을 지어 조선인·일본인·중국인 등 12∼13명의 여자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여자들 집에는 영내거주 간부급들이 평일 날 밤에 하룻밤을 지내고 갔고, 일반병사는 일요일 날 다른 곳에 있는 여자들 집까지 24㎞를 걸어서 놀러갔다”고 이야기 했다. 그와 같은 초년병들은 ‘돌격 1발’이라는 지시를 받고 여자들 집에 가기도 했다는 것.

 그의 부대는 제주로 향했지만 정작 부대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목포에 도착 할 때까지는 오키나와로 가는 줄 알았다. 수송선은 화물선으로 배의 맨 아래층에는 ‘군마’를 태웠다고 했다. “아마 제111사단 244연대의 주력부대는 그때 이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가미키씨의 말이다.

 부대는 어떤 경로를 거쳐 어디에 주둔했을까.

 그의 부대는 산지항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이동을 시작했다. “아주 굵은 벚꽃이 활짝 피어서 모든 군인들이 놀랐죠. 제주섬에는 낮에 도착했는데 큰 섬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가미키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제주비행장(당시 정뜨르비행장)을 우회하면서 지금의 무수천 부근(추정)에서 1주일 정도 처음 숙영한 데 이어 바리메오름 부근에서도 일주일 정도 머문다. 이어 해발 1,200m 고지인 ‘노로악’에서 15∼16일 정도 주둔하며, 갱도진지를 구축하다가 주지동(朱池洞·현재의 한경면 조수2리) 굽은오름 일대에 최종 주둔한다. 그 때가 6월로 종전때까지 갱도파는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굽은오름에는 70m 길이의 관통형갱도(도면) 등 10여 곳과 갱도 흔적 등 20여 곳 된다. 그런데 이 많은 갱도들이 중대병력만으로 불과 2개월 남짓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로 볼 때 제주섬 전체에 구축된 갱도 역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구축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244연대본부는 어디일까.

 제111사단 산하 244연대본부는 이계오름·저지오름 일대에 주둔했다고 알려진다. 그렇지만 가미키씨는 244연대는 ‘새신오름’에 주둔했다고 말했다. 가미키씨에 따르면 연대본부에서 주지동까지 거리가 4km 정도 된다고 회상했다. 특별취재팀과 함께 지난 5일 그가 직접 갱도굴착을 했던 굽은오름을 답사한 뒤에 “주변 정황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며 이 같이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마오름에는 243연대가, 244연대는 새신오름에 주둔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미군정이 작성한 일본군배치도도 비슷한 배치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부대편제와 무기체계는 어떠했을까.

 1개부대는 그 중심이 연대본부로 연대병력은 4천명 정도 된다. 제111사단이 243·244·245 등 3개연대로 구성된 점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1만2천명이라는 병력이 들어맞는다.

 연대본부 직속은 수송부대·행리부대·통신부대·위생부대로 구성됐다. 대대본부는 50명 정도의 지휘반이 있고 그 산하에는 1·2·3중대가 배속됐다. 중대병력은 2백명 정도로 3개 소대(소대당 50명 정도)로 구성됐다. 연대본부에는 집어넣고 발사 할 수 있는 보병포(직경 10cm의 대포)가 많았고 중기관총은 다섯정 정도가, 가미키씨 소속 3중대는 척탄총반 25명 1개반과 경기관총 5정을 갖춘 1개반, 소총은 99식으로 6.7mm의 소총탄환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굽은오름에는 어떤 포가 설치됐을까. 가미키씨는 이와 관련 직경 20cm의 유탄산포가 배치됐고, 모양은 삼다수 물병과 비슷하고 떨어지면 껍질이 터지고 안에 있는 포탄이 터진다고 했다.

 갱도 파는 작업도구는 순전히 괭이와 삽에 의존했다. 이 도구는 만주에서 이동할 때부터 가져왔다. 가미 키씨에 따르면 보병은 반드시 괭이와 삽 중 하나는 지니고 있어야 했다. 갱도를 파면서 나온 송이 등은 도구에 담아 어깨에 메고 날랐다고 증언했다.

 “굴을 관통시킨 후에는 내부가 시원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낮잠자는 일이 많았습니다. 당시 미군의 공격을 유인하기 위한 용도로 굴을 팠고, 오키나와에서도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굴 안에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쟁이 주는 공포감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전쟁을 하러 왔는지…, 놀러 왔는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8월 17일날 아침에 ‘중대장이 전쟁이 끝났다’고 했습니다. 전쟁에 졌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솔직한 마음으로는 병사들은 전쟁이 끝났다, 이제는 쉴 수 있다, 그런 느낌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당시의 전쟁 상흔이 섬 곳곳에 깊은 생채기를 드리우고 있는 현실에서 이번 제3차 제주·일본공동조사는 일본군 부대배치 및 갱도구축 실체 규명과 관련 관심을 끄는 대목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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