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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25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9. 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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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제111사단 주둔지 (18)월라봉의 갱도진지
오름 전체에 다양한 군사시설 구축


한라일보 : 2006. 09.07

▲물이 들어찬 월라봉 갱도 내부를 특별취재팀이 조명을 밝힌 채 조사하고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내부에 글자 새겨진 갱도 첫 확인

실태 파악 위한 정밀조사 등 필요


 월라봉에 대한 탐사는 지난달 19일을 비롯 세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예상 이외로 대규모 갱도가 구축된데다, 내부에 물이 들어차 있는 등 특별취재팀이 조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월라봉의 갱도는 다양성과 규모면에서 매우 주목된다.

 이 곳에는 탱크라도 드나듬직한 거대한 직선형 갱도가 있는가 하면, 정교한 토치카가 구축된 갱도도 자리한다. 병력이동로로 보이는 갱도도 있다. 또 야적장 흔적도 있어 일본군 군사시설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된다.

 특히 갱도 내부에 당시 동원된 사람들의 이름으로 보이는 한자들도 확인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갱도진지 내부에 명문이 새겨진 경우를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자가 뚜렷하게 보이는 갱도 내부 콘크리트 벽면(사진 위). 아래 사진은 갱목이 그대로 남아 있는 토치카 모습.
 월라봉의 갱도 가운데 직선형 갱도는 총 길이가 50여m 된다. 폭은 350cm, 높이는 250cm 정도에 이를 정도로 넓고 높다. 약간 무너져 내린 입구에 들어서면 관통한 맞은편 쪽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갱도는 월라봉을 관통해서 화순해안가 방향으로 곧게 나 있다.

 직선형 갱도 앞은 최근 해군기지 건설로 한창 몸살을 앓고 있는 화순 앞바다와 산방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갱도는 폭과 높이면에서 송악산 알오름 지하호에 비견할 만 하다.

 직선형 갱도와 함께 특별취재팀을 놀라게 한 것은 정교한 토치카가 구축된 대형갱도의 발견이다.

 길이가 2백여m 되는 이 갱도는 입구가 2곳 나 있으며, 내부는 해안쪽으로 3개의 출구가 나 있다. 갱도 내부는 다시 작은 공간이 2곳 마련돼 있다.

 입구 2곳의 길이는 각각 30m 정도이며, 30도 정도로 경사져 있다. 또 관통한 출구 3곳의 길이는 각각 35m 정도 된다. 가운데 주통로의 길이는 31m다. 토치카는 가운데 관통한 갱도에 있다. 토치카 관측구를 통해서 바로 화순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 토치카는 콘크리트로 아주 정교하게 잘 마무리 돼 있다. 규모로 볼 때 중기관총의 진지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 직선형 갱도의 토치카에 대해 츠카사키씨(일본15년전쟁연구회 연구원)는 “15센티 곡사포를 배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당시 갱도구축에 동원된 사람들의 이름으로 보이는 한자는 직선형의 갱도 맨 끝에 새겨져 있다. 당초 콘크리트 토치카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새긴 듯 대내(大內)·지(地)·박(朴) 등 글자가 선명하다. 이에 대해 허수열 충남대 교수는 지난 2월 말 본보 특별취재팀과 함께 한 조사에서 “당시 동원된 사람들의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당시 갱도구축에 동원된 사람들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처럼 월라봉에 대규모로 다양한 일제 군사시설이 구축된 이유는 무엇일까.

▲월라봉에서 보이는 산방산과 화순 앞바다 모습.

 안덕계곡을 품고 있는 월라봉(안덕면 감산리 소재·표고 200m·비고 101m) 정상에 서면 산방산과 화순항, 알뜨르비행장 등이 한눈에 잡힌다. 제주 서남부로 미군이 상륙할 경우를 상정하면 월라봉은 더 없이 중요한 전략적 입지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라봉에는 일본군 제111사단 예하 포병 중대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려지나 부대이름 등 정확한 실체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특별취재팀이 현장에서 만난 지역주민의 증언은 구체적이어서 눈길을 끈다.

 화순리 거주 강문팔 옹(83)은 월라봉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모리야마’(森山)부대라고 구체적으로 거명했다. 부대장인 모리야마 대좌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불린 것이다.

 월라봉에는 또 물이 들어찬 갱도 2곳을 비롯 조사를 진전시키지 못한 갱도 등이 3∼4군데 확인된다.

 때문에 월라봉의 갱도에 대한 정확한 실태파악을 위한 정밀조사는 물론 보존방안이 반드시 마련돼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안덕면 화순리 강문팔옹]일본군 모리야마 부대 주둔

 “월라봉에는 모리야마(森山)부대가 주둔했어. 또 논오름에는 영삼(O三)부대가 주둔했지. 그런데 굴은 ‘도리데부대’(鳥大)가 팠어. ‘도리데부대’는 군대였지만 일종의 예비군으로 구성됐고 행색이 초라해서 노무자나 마찬가지였지.”

 화순노인회관에서 만난 강문팔 옹(1923년 생·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은 특별취재팀에 태평양전쟁 당시 월라봉 일대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강 옹은 1943년 3월 무렵부터 6개월 동안 알뜨르비행장 확장 공사때 ‘십장’으로 노역했다. 일본 고베에서 고무 관련 회사에 근무했었기 때문에 알뜨르비행장 확장 공사에 동원돼 진해경비시설부 소속으로 노역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강 옹은 “그 때 6개월 동안 매월 60원씩의 월급(면장은 45원)을 받았고, 당시 귀했던 담배(興亞)까지 배급받았다”며 대우가 좋았다고 말했다.

 강 옹은 당시 송악산 알오름에 굴파는 것을 알았고 ‘다데마(多手心)구미’란 회사가 노무자를 동원해서 팠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알뜨르비행장에서 노역 당시에는 월라봉 주변에 군대가 들어오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만둔 후에 일본군이 월라봉 등 주변에 들어왔다는 것.

 또 강 옹은 “‘모리야마 부대’는 처음 마차를 끌고 와서 주둔했다”며 “월라봉 갱도에도 갱목을 많이 세웠으나 광복 후에 주민들이 가져가서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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