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 실태 23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8. 29. 21:13

본문

제111사단 주둔지/(16)단산
단단한 바위 뚫고 토치카·갱도진지 구축


한라일보 : 2006. 08.24

▲토치카가 구축된 단산의 갱도 입구, 멀리 모슬봉이 보인다.
항공폭격에도 끄덕없을 만큼 견고

포병부대 주둔… 서남부 전략거점


 “금후 중점을 서남부에 집중하기 바란다”

 이 한줄의 메모는 다름아닌 일본군 제17방면군 미야자키(宮崎) 제1부장이 남긴 것이다.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임박한 1945년 7월 1∼2일 제주를 방문한다.

방문 목적은 미군 등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한 작전상황을 점검하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짧고 단호한 이 메모는 패전위기에 몰린 일본이 제주 서남부를 반드시 사수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산의 갱도내 벽면에 뚜렷이 남아있는 착암기의 흔적
 일제는 서남부 해안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에 대비 이 일대 해안과 오름에 강력한 저항진지를 구축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었다. 특히 단산∼산방산∼월라봉∼논오름∼군산 라인은 포병부대가 집중 주둔하는 등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듯 안덕면의 단산에서도 토치카(Totschka)등 일제 군사시설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은 지난해 12월 말과 지난 5월 등 세차례에 걸쳐 단산에 대한 조사에 나섰다.

 단산(簞山·바굼지오름)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졌다. 표고는 1백58m, 비고는 약 1백10m, 외형부터가 제주의 오름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곳의 토치카가 구축된 갱도는 단단한 암반을 뚫고 만들어졌다. 항공폭격에도 끄덕없을 만큼 한눈에도 견고한 느낌을 준다.

 토치카 갱도진지의 내부는 오밀조밀하게 꾸며졌다.

▲도면
전체길이가 70여m 되는 갱도는 그 내부에 토치카시설과 분대정도의 병사가 쉴 수 있는 공간, 능선을 관통한 통로 등이 만들어졌다.<도면>

 대공진지인 토치카는 10여개에 이르는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중간지점에 이르면 왼쪽으로 1평이 채 안되는 공간이 있다.

 콘크리트로 된 토치카 내부는 2.5m×2.7m 규모로 관측구가 2개 나 있다. 관측구를 통해서 모슬포 인성리의 너른 벌판이 한눈에 잡힌다. 모슬봉과 인성리 사이 개활지로 진입하는 미군을 요격하기에는 안성마춤의 자리에 토치카가 자리해 있는 형국이다.

 갱도의 가장 깊속한 곳은 비교적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10여명이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이 갱도는 단산의 계곡 쪽으로 관통돼 있다. 계곡 맞은 편에는 또하나의 갱도가 있다.

▲갱도 내부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
 길이는 20여m 정도로 왼쪽으로 휘어졌다. 내부 벽면에는 바위를 뚫은 구멍과 길게 나 있는 홈 등 역시 착암기의 굴착흔적들이 뚜렷이 나타난다.

 단산의 또 다른 진지는 7부능선 지점에서 찾아냈다.

 특별취재팀은 꼭꼭 숨어있는 이 갱도를 찾기 위해 지난 5월 말 밧줄을 이용 절벽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탐사 가운데 최고의 난코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갱도 입구는 정서방향으로 나 있다. 갱도 앞쪽은 모슬봉이다.

 우거진 잡목 사이로 너른 들판이 보인다. 이 갱도 역시 단단한 바위를 뚫고 만들어졌다.

 입구는 폭이 2백10cm, 높이 2m 정도로 총 길이는 40m 규모다. 12m 정도의 내부 진입부를 지나면 갱도는 좌우 양쪽으로 갈린다. 갱도 벽면에는 착암기의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단산의 갱도에 설치된 토치카 내부

 단산의 갱도는 취재팀이 확인한 4곳과 진지흔적을 포함할 경우 7∼8곳이 된다.

 단산에는 어떤 부대가 주둔했을까.

 ‘제58군배비개견도’ 등 일본측 자료를 종합하면 단산 일대에는 제58군사령부 직할인 제12포병사령부 예하 독립산포병 제20연대가 주둔한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군은 제주 남서부로 상륙하는 미군을 원거리 포격하기 위해 단산에 포병부대를 주둔시켜 놓은 것이다. 토치카 등 단산의 군사시설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일본군 주둔실태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현장이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서귀포시 도순동 김영춘 옹]“포격 피해 단산까지 피했던 기억 생생”

이제 80을 바라보는 김영춘 옹(1928년 생·서귀포시 도순동 879)은 17세때인 1944년 봄부터 1945년 여름까지 진지구축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확장공사 등에 동원됐다.

 1944년 봄에 부친이 동원됐다가 농삿일 때문에 1개월만에 돌아오는 바람에 대신 알뜨르비행장에서 노역에 시달린 김 옹은 그 해 가을에도 또다시 알뜨르비행장 확장 공사와 송악산 갱도진지 구축에 투입됐다.

 “당시 한번 동원되면 2개월을 살았지. 그렇게 해서 알뜨르비행장에만 2번 동원됐는데, 돌멩이를 잘게 부순 자갈과 콘크리트를 반죽해서 격납고를 만들었어. 그런데 격납고 위로 자갈을 지고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다쳤던 기억이 생생해. 그때 미군비행기가 자주 공습했는데, 미군기는 서쪽에서 접근한 후 송악산을 돌아서 나갔어. 그러면 일본군은 송악산 알오름 고사포 진지에서 포를 쏘아대지만 미군기는 맞지 않았어. 당시 너무나 무서워서 정신없이 달려서 바굼지오름(단산)까지 가서 숨어 지냈어.” 김 옹은 그때 바굼지오름에서 일본군을 목격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김 옹은 이어 1944년 가을에는 송악산에서 굴(갱도)을 파는데 동원되기고 했다고 증언했다.

 “굴은 곡괭이로 파고 삽으로 해서 도로코에 싣고 흙을 내쳤어. 두달 동안 하고 그 후 다른사람이 투입돼서 파곤 했지. 십장은 육지사람이 맡았어. 굴은 송이층이니까 무너져 내려 부상당한 경우도 많았어.”

 김 옹은 당시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노동을 했다며 오전 6시가 되면 종소리에 따라 기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돈 10원은 커녕 반찬도 없이 콩밥·옥수수밥에 시래기국으로 끼니를 때우다가 식구들이 가져다주는 고구마나 미숫가루 등으로 배고픔을 달랬다고 덧붙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물음에 김 옹은 “일본놈 종살이만 해진것 같아”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