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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21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8. 1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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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를 가다
원형 간직한 토치카시설 발견


한라일보 : 2006. 08.10

▲본보 특별취재팀이 거문도 서도의 음달산에서 발견한 일본군 토치카 시설(사진 위). 토치카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면 갱목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사진=특별취재팀
갱목 등 그대로 남아 당시 모습 ‘생생’

갱도·토치카 등 군사시설 제주와 유사


 남해안의 거문도는 제주와 유사점이 많다. 돌로 담을 쌓거나, 테우를 활용한 어업, 음식 등에 이르기까지…. 일본 뿐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 등 서구열강에 의해 침탈당한 역사까지 거문도는 ‘또하나의 작은 제주’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와 닮은 것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본보 특별취재팀은 제주와 거문도의 일제 군사시설 비교조사차 현지취재(6월 25∼6월 28일)를 벌였다. 이번 현지조사에서 기존에 알려진 군사시설 외에 거의 원형대로 남아있는 토치카 시설이 처음 발견돼 취재팀을 놀라게 했다.

 거문도는 고도 서도 동도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에 수산물 등이 풍부해 일제강점기 부터 ‘돈 섬’이라 불릴 정도로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특별취재팀은 거문도 취재과정에서 이 곳 주민인 김충현씨(1934년 생·서도리 903)의 도움을 받아 서도 음달산 사면 무성한 잡목 속에서 거의 원형대로 남아있는 토치카 시설을 처음 찾아냈다. 토치카는 동도와 고도 뿐 아니라 거문도의 내해와 외해까지 조망이 가능한 지점에 버티고 있다.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토치카 시설은 위압스런 모습으로 다가온다.

 토치카는 바깥에서 제일 안쪽까지의 길이가 3백10cm로 정북방향을 하고 있다. 중화기 등이 장착되는 공간은 역삼각형 형태로 안으로 갈수록 좁은 형태다. 천장에는 갱목이 10여개 남아 있다. 갱목 지름은 20cm, 제일 바깥쪽 갱목은 길이가 3백5cm에 이른다. 높이 40cm 정도의 공간을 겨우 기어서 맨 안쪽으로 들어가자 내부는 2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또 천장에도 크고작은 갱목이 가로 세로로 박혀 있다. 광복후 60여 년 만에 공개되는 현장은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다.

▲동도 해안가에 구축된 갱도 내부에서 바라본 거문도 내해와 서도의 모습.
 토치카 내부 양쪽으로는 넙적한 돌을 쌓아 지금은 폐쇄된 상태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광복 후에 막아버렸다고 한다.

 토치카 주변으로는 일본군 주둔지가 분포한다. 무성한 수풀사이로 석축이 높이 최고 150cm, 폭 60cm 이상 규모로 수십미터 길게 이어져 당시 주둔지 였음을 실감케 했다.

 취재팀이 찾아낸 음달산 토치카시설은 거문도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일제 군사시설의 구축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 된다. 또한 거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정밀조사와 함께 보존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지적된다.

 광복 당시 13세로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는 김충현씨는 “서도국민학교에 일본해군이 주둔했고, 토치카에 이르는 길을 닦는데 국민학교 학생들이 동원됐었다”고 말했다. 또 김씨는 “토치카 인근에 일본군이 큰 천막 2개를 치고 주둔했었고 연병장으로도 사용하면서 체조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일제는 군사시설 구축에 국민학교 어린이들까지 동원한 것이다.

 취재팀은 또 서도리 이해포 부근 엄나무산 사면에서 일본군이 구축한 소규모 갱도를 찾아냈다.

 이 갱도는 엄나무산 북서방향 사면에 있다. 교통호가 15m 이상 이어진 가운데 암반을 뚫고 길이 10m 정도의 갱도를 만들다 중단한 상태다. 굴 내부는 흘러나온 지하수가 고여 있다.

 최근 정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바 있는 거문도의 일제 군사시설은 제주와는 규모나 다양성 면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러모로 눈길을 끈다.

▲‘h’형으로 된 갱도내부. 천장에 철제 H빔이 보인다.

 바위를 굴착하고 갱도형으로 뚫은 군사시설의 구조는 10∼15m 내외의 직선형이 8곳, 왕(王)자형 1곳, 알파벳 ‘h’를 돌려놓은 형태 1곳 등으로 구분된다. 너비는 250cm∼280cm 내외, 높이는 280cm 내외다.

 이 중 동도에서는 갱도 6곳(입구 9곳)과 해안가의 갱도 접안시설 1곳, 서도에는 갱도 4곳이 확인된다.

 갱도 이외에 확인되는 군사시설은 서도 불탄봉 정상의 T자형 콘크리트 시설 2곳과 음달산의 토치카시설 1곳, 일본군 주둔지 석축시설 1곳 등이다. 고도 회양봉 중턱의 방벽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등 일제 당시 군사시설물로 단정짓기에는 추후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지적됐다.

 이 가운데 동도의 왕(王)자형 갱도는 입구가 세 곳으로 총 길이는 1백m에 이른다. 일제가 파놓은 거문도의 군사시설 중 가장 큰 규모로 갱도내부는 물이 무릎 정도까지 들어차 있다. 거문도 갱도의 용도는 군수물자·장비 보관용이나 방공호 등으로 만든 군사시설이 있는가 하면 대공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대공용으로 구축된 갱도는 동도 해안가 갱도 위에 위치해 있다. 입구는 중화기를 배치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마치 한경면 수월봉의 콘크리트 갱도와 아주 흡사하다.

 거문도의 군사시설은 대부분 완성도가 높은 특징을 보인다. 암반을 굴착한 뒤 콘크리트를 두텁게 덧씌운 형태다.

 거문도에 이처럼 군사시설을 구축한 이유는 이 곳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거문도는 전남 여수와 제주도의 거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일본과도 가깝다. 거문도∼부산이 1백81km, 거문도∼규슈는 1백61km이다. 예부터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중간기항지 역할을 했다. 제주대 황석규 박사는 “거문도에서 이번에 처음 찾아낸 토치카를 비롯 갱도와 군주둔지 등 다양한 군사시설이 확인됐다”며 “제주의 일본군 군사시설과 일본군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여러모로 시사적”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일제강점기 이전 세계열강 제주와 거문도에 집착했다”

 일제강점기 이전인 1845년부터 세계열강은 제주도와 거문도에 집착하게 된다.

 영국과 러시아는 크림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패권다툼을 위해 거문도와 제주도에 대한 탐사 및 점령을 시도한다.

 특히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가 겨울에 얼어붙는 관계로 부동항을 얻기 위한 노력을 감행할 목적으로 제주도와 거문도에 주목하고, 영국은 자신들의 방어망을 유럽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도 러시아에 뚫려서는 안 된다는 목적으로 1885년 4월 거문도를 무단으로 점령한다. 이에 러시아는 1885년 3월부터 제주도를 무단 점령 혹은 조선정부에 임대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일본은 노일전쟁의 압승과 합일합방을 통해 제주도와 거문도에 군사시설을 구축하게 된다. 거문도는 서도, 동도, 고도의 3개 섬으로 이뤄졌지만, 일본은 고도를 행정과 거주의 목적으로 이용하였고, 서도와 동도를 중심으로 군사시설을 구축하였다.

 제주도에 구축된 갱도진지보다 대부분 시멘트 구조물을 이용하여 완성도가 높았지만 갱도진지의 규모와 수는 상대적으로 아주 미약했다.

 동도에 9개의 갱도진지가 해안가에 구축되어 있는데 철근의 H빔을 이용한 것과 유실되어 흔적이 희미하지만 해안 접안시설은 특징이 있었다. 그 중 7개의 갱도진지는 군수물자 보관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위에 구축된 2개의 갱도진지는 밑의 갱도진지를 보호할 목적으로 화기 사용이 가능하게 제작되어 있었다.

 서도의 갱도진지는 불탄봉과 음달산 2곳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덕촌마을 불탄봉 정상의 2개 갱도진지는 거문도 지역을 관측하는 용도로 판단되며, 변촌마을과 서도마을 중간에 위치한 음달산의 일본군 주둔지와 토치카는 이번 조사의 백미였다. 토치카는 아름드리 갱목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지리적으로 세계열강의 주목을 동시에 받았고 일본군 전적지가 남아있는 거문도에서 제주도의 생활방식의 동질성까지 느껴짐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석규·사회학·제주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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