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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베를린 제패 그 이후 1

세상보기---------/사람 사는 세상

by 자청비 2006. 10. 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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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표의 스포츠野史 
<칼럼니스트>


베를린의 영웅이 개선했지만 총독부의 통제로 여의도 공항은 환영인파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양정교장 안종원, 친형 손기만만이 손기정(왼쪽부터)을 마중나왔다.
사진 제공=한국 체육인 동우회
1937년 봄에 양정고보를 졸업한 손기정은 고려대학의 전신인 보성전문(普專)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들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하였다. 3년제 보성전문 상과의 한 학년 정원은 100명 가량이었는데 농구, 축구, 럭비, 육상 등 종목에서 선수를 뽑았더니 과장된 표현을 섞어 전후 좌우로 한 학생 건너 운동 선수가 배치되었다고 한다. 남자프로농구 삼성 조승연(趙勝延) 단장의 부친 조득준(趙得俊)은 손기정과 함께 그 해에 상과에 입학했는데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대회 연속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를 평정하는 보전 농구부의 주력센터였다.

손기정은 육상부를 대표하여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전 우승에 기여한다.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참가 7개팀의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하였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에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 우승하였다.

손기정이 보전에서 학업을 계속,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상과 1학년 과정을 한학기만을 다니고 퇴학하였다. 오늘날 고려대학 애칭은 ‘민족고대’이다. 광복 전,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우리말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된다.
조선을 통치하는 총독부에게 손기정은 골치 아픈 존재가 되었다. 이미 1936년의 올림픽 제패 후, 전 조선은 손기정의 우승으로 민족의 우수성을 자각했고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일제의 조선통치에 반항한 바 있다.

1936년 초가을. 손기정은 서울에 쓸쓸하게 돌아왔다. 부산에 상륙하여 기차로 상경했다면 도중 정차하는 역마다 사람들의 대환영 속에 영웅이 되어 귀경 개선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비행기편을 마련, 일본을 출발케 하여 울산을 거쳐 여의도 비행장에 내리게 했다. 당시의 여의도는 신길동으로만 다리가 놓여있는 섬이었다. 여의도 비행장엔 조선인들의 소요를 경계하는 경찰관들 틈에 신의주에서 상경한 형 손기만(孫基萬)과 양정의 안종원(安鍾元) 교장만이 섞여 있었다. 학교에서는 전교생이 대대적인 환영준비를 차리고 영웅의 귀교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손기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의도에서 체육교사 김수기 씨댁(손기정의 하숙처)으로 직행하여 이후 그의 지도 속에 재경생활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존재의 손기정이었기에 총독부는 그가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려했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총독부의 관헌이 주야 감시, 감독하는 눈을 견디지 못해 1937년 2학기에 보전을 퇴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 편입학했다. 도쿄에서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 하코네는 도쿄에서 서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명승지인데 그 사이를 각 대학팀이 왕복하며 겨루는 역전경주는 일본의 한해를 여는 풍물시(風物詩)였다.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리지 않았다. 손기정이 달리면서 재일 조선인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두려워 그에게 공중 앞에서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마라톤의 손기정은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하고 나서 달리지 않고 어두운 일제시대를 보내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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