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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28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10. 3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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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제111사단 주둔지 (20)군산
전쟁상흔 속살깊이 간직


한라일보 : 2006. 09.28

 

▲인근 주민들이 기도처로 이용하는 군산의 갱도 내부에서 밖을 바라본 모습(사진 위)과 널찍한 공간이 형성된 내부 모습.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길이 120m 대형갱도 등 8곳 확인

기도처로 이용되는 등 점차 훼손


 안덕면 대평리에서 바라본 군산(표고 334.5m)은 영락없이 뿔이 두개 달린 형상이다. 정상부에 서면 모슬포 송악산에서부터 서귀포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제주섬 남서쪽 해안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요충지다. 한 때 이 오름은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 일어난 서산(瑞山)분출의 진원지가 군산이라는 설이 제기돼 주목받기도 했다.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이 곳 역시 일본군의 전쟁야욕이 남긴 상처가 곳곳에 깊은 생채기를 드리우고 있다.

 특별취재팀은 지난 23일을 비롯 세 차례에 걸쳐 현장탐사와 증언채록을 병행했다. 현장조사 결과 군산에는 모두 8개의 갱도진지가 구축돼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군산의 갱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정서방향 9부 능선 지점에 있다. 이 갱도는 총 길이가 1백20m 정도로 대형이다. 서남쪽으로 난 입구는 폭 90cm, 높이 60cm 정도로 작지만 내부 진입로는 최대 폭이 250cm에 이른다. 갱도는 송이층과 암반층을 뚫고 만들었다. 갱도는 30m 정도의 진입부를 지나면 양쪽으로 나뉜다. 하지만 왼쪽 갱도는 무너져 있는 반면 오른쪽으로 난 갱도는 70∼80m 정도 이어졌다. 폭은 135cm, 높이는 180cm 내외다. 이 갱도는 길이에 비해 방으로 볼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밖에 없다. 때문에 내부에 군병력 주둔용 보다는 병력의 이동로 용도로 구축되지 않았나 추측된다. 갱도 끝부분은 바깥쪽과 관통시키려던 한 흔적이 있으나 무너져 있는 상태다.

 마을주민에 따르면 이 곳 갱도내부에 설치됐던 갱목 등은 인근 1945년 당시 창천국민학교 건물을 지을때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도면
 또 하나의 눈길을 끄는 갱도는 산책로 인근에 있다(도면). 이 곳은 갱도 입구가 두 곳으로 각각 바다와 한라산 방향 등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내부는 가로 8m 세로 4m 정도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곳 내부 공간은 스님들이 기도처 등으로 활용하면서 많이 넓어졌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내부는 폐비닐과 스티로폼, 술병 등 쓰레기가 널려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현재도 갱도 내부는 이 일대 마을주민들이 비념을 하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으면서 많은 훼손이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특별취재팀이 안덕면 군산에서 확인한 길이 120m 규모의 대형 갱도 내부.
 주민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일본토사수를 위해 제주섬을 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파놓은 갱도가 기도처로 활용되는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곳에는 또 관측구로 보이는 정상부의 갱도와 서로 관통시키려다 중단한 갱도 및 높이와 폭이 1m 내외에 불과한 갱도 등 다양한 구조를 보인다.

 일본군이 남긴 ‘제58군배비개견도’ 등 관련 병력배치도를 종합하면 군산 일대에는 일본군 제111사단 포병연대와 제1야전병원 등이 주둔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 군산 북측에는 111사단 예하 보병 제245연대가 주둔한다. 군산은 245연대본부 주둔지로 보이는 논오름과 월라봉 등과 함께 미군의 제주서남부 일대 상륙에 대비한 강력한 진지인 것이다. 군산의 많은 갱도들은 단산∼산방산∼월라봉∼군산 라인이 일본군의 핵심 주저항진지임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군산 역시 그 이면에 전쟁의 상흔을 속살깊이 간직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현장 인터뷰]“광복 2∼3년전부터 굴을 파기 시작

사유지에 굴을 파도 항의 꿈도 못꿔”


▲사진 왼쪽부터 김재천·양성일·이순호씨
 특별취재팀은 군산 일대를 탐사하는 과정에서 안덕면 대평리가 고향인 양성일(88), 김재천(84), 이순호씨(66) 등 세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군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취재팀과 자리한 이들은 고향에서 혹은 일본에서 일제 강점기를 보낸 대평토박이다.

 이들 세 사람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은 마을주민 등 민간인들은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 뒤 군산, 월라봉 일대에 많은 굴을 팠다고 증언했다.

 광복 당시 26세였다는 양성일씨는 “군산 등지에서는 해방되기 2∼3년 전부터 일본군들이 굴을 파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또 양씨는 “군산, 월라봉, 안덕계곡 등지 주둔 일본군은 ‘모리야마(森山 )부대’로 불렸고, 장교들은 말을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안덕천에서 창천리까지 내창(하천가 일대)에 많은 일본군들이 천막치고 주둔했다는 것. 또 일본군과 군속인 노무자만 굴을 팠고 민간인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고 말했다.

 양씨는 이어 아픈 가족사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당시 일본군이 모슬포 고사포진지에서 미군기를 향해 포사격을 하자 미군기가 우회하면서 기관총을 쏴대는 바람에 바닷가 배에 있던 처남이 폭격으로 사망했으나 시신도 찾지 못했다는 것. 또한 월라봉 자신 소유의 밭에 일본군들이 일직선으로 굴을 팠지만 항의도 못했다며 사전 허락을 받거나 보상은 커녕 항의하면 ‘빠가야로’ 하면서 욕이나 매가 돌아왔다고 말했다.

 17세 때 배를 타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광복 직후 귀국한 김재천씨는 “월라봉과 군산 일대 주둔부대는 ‘마루산’(0三)부대로 불리기도 했다”고 다르게 증언했다.

 그런데 마루산부대, 즉 영삼부대는 논오름 일대에 주둔한 부대였다는 증언이 있다. 특별취재팀이 월라봉 탐사과정에서 채록한 “영삼부대는 논오름에 주둔했고, 일본군 중에서 가장 강한 군대였다”는 증언 등을 고려하면 군산의 일본군은 ‘마루산부대’보다 ‘모리야마부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순호씨는 1945년 해방이 되자 창천국민학교를 지으면서 군산의 갱목을 가져다 건축자재로 썼다고 말했다. 또 일본군들은 갱목을 민간인들에게 팔기도 했다는 것. 군산의 갱도에 대해서도 이씨는 “갱도 내부에 물이 고이자 방목중인 소들이 물을 먹고 뒷걸음질쳐서 빠져 나오기도 했다”며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대평리 일대에서는 “목화와 보리 고구마 등 공출이 심했다”며 “일본군들은 우리나라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도 안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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