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맨 위부터 차례로 ▷구산봉 갱도 내부를 조사하는 취재팀 ▷갱도 입구 ▷일본군이 주둔했던 ‘종낭샘이’ 일대 ▷대포 포구에서 바라다 보이는 해안가.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구산봉 일대서 소형갱도·주둔지 확인
“도전역 전수조사 등 이뤄져야” 지적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은 송악산이나 수월봉 일출봉 서우봉 삼매봉과 같은 해안가 오름에만 특공정기지와 갱도를 구축한 것이 아니다. 조그만 포구에도 갱도 등을 파고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면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본보 특별취재팀은 지난달 30일과 이달 14일 서귀포시 대포 해안과 중문지역의 구산봉 일대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대포 해안은 이전 탐라국시대부터 중국과 한반도와의 교역항포구로서의 역할을 해온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적하고 조그만 포구로서 옛 명성은 찾을 수 없다.
취재팀은 대포 마을 주민으로부터 해안에 일본군이 판 굴(갱도)이 있다는 증언을 듣고 갱도를 찾아 나섰다. 취재 결과 대포 해안에는 소형 갱도 1곳과 무너진 갱도흔적이 확인됐다.
해안가 암반을 뚫고 만든 소형갱도는 공사를 하다 중단된 형태로 길이가 5m 정도로 작다. 갱도 앞은 바로 대포포구로 어선들이 드나드는 길목이다. 대포 포구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포 포구의 갱도는 일본군 제111사단 주둔병력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일본군의 병력배치도인 ‘제58군배비개견도’를 보면 제111사단은 한경면 고산일대를 경계로 하여 제121사단과, 남쪽으로는 서귀포시 중문동 일대를 경계로 제96사단과 나뉜다. 서귀포시 대포 일대는 제111사단의 작전구역으로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단산∼산방산∼월라봉∼군산 주저항진지나 송악산 수월봉 등의 해안과는 갱도의 규모와 집적도 면에서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자체로서 일본군의 제주주둔 실태를 보여주는 아픈 역사현장인 것이다.
이와 관련 특별취재팀이 주목한 것은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 구산봉이다. 대포 포구와는 직선거리로 2∼3km에 불과하다. 구산봉은 지역주민들 사이에서는 망동산이라 불리기도 하는 표고 174m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이 오름은 정상부까지 감귤과수원 등이 조성돼 있다.
취재팀은 서귀포시 하원동 주민인 김근서 옹(84·하원동 314)과 김신길씨(56·하원동 738)의 안내로 구산봉에 대한 조사를 통해 소형 갱도와 일본군주둔지 등을 확인했다.
과수원 내에 있는 구산봉의 갱도는 총 길이 12m로 오름 7부 능선 지점쯤에 직선형으로 뚫려 있다. 입구는 남쪽방향으로 나 있으며 폭 1m, 높이는 120cm 정도 된다. 갱도 끝 부분은 폭과 높이가 각각 145cm, 140cm 정도다. 검붉은 황토흙을 파 들어간 이 갱도는 감귤을 재배하면서 저장고로 쓰기 위해 입구를 시멘트구조물로 보강해 놓은 상태나 일부는 허물어져 있다.
구산봉 갱도 앞에서는 서귀포시 대포 해안 일대가 한눈에 쏘옥 들어온다. 거기에다 산방산과 월라봉 군산 우보악 모라이 녹하지오름과 거린사슴 등 주변에 갱도가 구축된 오름을 두루 조망 할 수 있는 입지를 지니고 있다. 높지 않은 오름이면서도 사방으로 관측이 가능하다는 점이 일본군이 진지를 구축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김 옹에 따르면 구산봉 일대의 일본군은 대포동 지역의 속칭 ‘종낭샘이’라 불리는 곳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다고 한다. ‘종낭샘이’는 현재도 수질이 깨끗한데다 수량이 풍부해 일본군이 주둔지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
구산봉에는 이 곳 말고도 기역(ㄱ)자로 만든 갱도 등 2곳이 더 구축됐다고 김근서 옹은 증언했다. 3곳 이상 갱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곳은 이미 입구가 막힌 상태고, 다른 한 곳은 잡목이 우거지는 등 지형상 접근이 어려워 확인하지 못했다.
제58군배비개견도에는 구산봉 일대가 전진거점진지로 나타난다. 전진거점진지(前進據點陣地)는 주저항진지에 접근하는 미군의 공격을 저지해야 하는 최전선진지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면 태평양전쟁 당시 하원 일대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구산봉 갱도와 ‘종낭샘이’ 주둔지, 대포해안 등과 연관지어 의미를 찾을 수 밖에 없다.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포 해안에서 생각지 못했던 갱도가 발견된 예에서 보듯이 제주전역에 대한 전수조사가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통해 제주주둔 일본군 실체 규명과 역사적 의미 조명 등 총체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팀
[인터뷰/서귀포시 하원동 김근서 옹]“공출·강제노역에 시달려”
▲특별취재팀을 현장 안내한 김근서 옹이 강제동원 됐던 당시기억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들은 대포 지경의 ‘종낭샘이’ 일대에 주둔하면서 그 곳 샘물을 먹고 살았지. 장교들은 말을 타고 그 곳서 구산봉을 오간 반면 일반병들은 걸어서 다녔어. 구산봉 주변에는 구루마들이 많았어.”
특별취재팀을 현장 안내한 김근서 옹(1922년 생·서귀포시 하원동 314)은 해방 당시 22세로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에 2차례에 걸쳐 강제동원된 아픈 기억이 있다. 한번 동원될 때 마다 2개월씩 노동에 시달렸다. 당시 하원마을에서는 1개반에 1명씩 12명이 같이 동원됐다는 것.
김 옹은 당시 하원마을은 3백여 가구가 사는 대촌(大村)이었다며, 하원에서만 일본 북해도로 5명이 강제징용돼 해방후 살아서 돌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옹에 따르면 ‘종낭샘이’ 일대는 당시에는 소나무 밭이었다며 주둔병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한 2개 중대쯤으로 추정했다.
김 옹은 또 일본군들이 말이 죽으면 묻기도 했고 당시 ‘종낭샘이’ 지경에 말무덤도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며 “일본군들은 패전 뒤 하원 앞바다에 많은 군수품을 버리고 갔다”고 말했다. 김 옹은 그러면서 “당시 보리공출은 물론 유기그릇, 면화 등 공출이 많았어. 기막막힐 노릇이지” 라고 회상하며 “죽일 놈들”이라고 분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