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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32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11. 18.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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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1사단 주둔지 (23)거린사슴과 족은거린사슴
갱도 확인…日 포병부대 주둔 흔적

한라일보 : 2006. 11.09. 00:00:00

▲족은거린사슴오름의 갱도 앞에 길게 나있는 교통호를 취재팀이 실측하고 있다./사진=이승철 기자 sclee@hallailbo.co.kr
거린사슴갱도 실체 탐사 통해 처음 알려져

 바야흐로 한라산의 수림지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취재팀이 찾은 거린사슴(표고 743m)은 한라산 1100도로를 타고 서귀포시 방면으로 가다 영실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오름이다.

 거린사슴은 서쪽으로 트인 말굽형 분화구를 가졌다. 분화구 내부에는 석축시설도 눈에 띈다. 오름사면에는 순환도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1100도로에서부터 이어진 순환도로는 누가 언제 무슨 용도로 만들었는지 불명확하다. 주변정황으로 볼 때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과 관련돼 있지 않을까 추정할 뿐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취재팀이 거린사슴오름에서 확인한 갱도다.

 취재팀은 순환도로 바로 위쪽 7부 능선 지점에서 소규모 갱도를 찾아냈다. 거린사슴오름에도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갱도를 구축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갱도의 전체 길이는 25m 규모로 소형이다. 입구는 정서방향으로 갱도 앞은 교통호가 반원형을 이루면서 구축돼 있다. 양 갈래로 난 교통호 사이는 둔덕형태를 이루고 있다. 갱도와 연결된 교통호는 대부분 단선형태가 많았던 점에 비춰보면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취재팀이 거린사슴오름에서 찾아낸 갱도 내부를 조사하는 모습
 붉은 송이층을 뚫고 만든 갱도 내부는 Y자형에 유사한 구조다. 갱도 내부 통로는 왼쪽으로 관통하려고 시도한 듯이 보이고 오른쪽 통로는 맨 끝에 작은 공간(가로 340cm× 세로 140cm)이 하나 만들어져 있다. 취재팀의 인기척과 불빛에 놀란 박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취재팀은 이 곳과 10여m 떨어진 지점에서도 매몰된 갱도 흔적을 찾아냈다. 교통호의 구조도 바로 옆 갱도와 아주 흡사한 형태다. 이로 볼 때 일본군은 거린사슴오름에도 여러 개의 갱도진지를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취재팀은 이어 1100도로 북동쪽의 족은(작은)거린사슴에 대한 탐사에 나섰다. 취재팀이 찾아낸 족은거린사슴오름의 갱도는 전체길이가 교통호를 포함 10m 정도로 소형이다. 갱도 자체는 4m 정도에 불과하지만 교통호가 잘 만들어져 있다. 입구는 북서방향으로 주변에는 큰 암괴가 자리하고 있다. 갱도의 전체적인 양상은 공사를 하다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거린사슴오름 일대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어떤 부대일까.

 이에 대한 관련자료나 문헌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주변 오름에 주둔한 일본군 배치 정황으로 볼 때 포병부대와 관련돼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족은거린사슴오름의 갱도

 이곳과 가까운 우보악 일대에는 박격포29대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한경면 일대에 보병을 중심으로 한 243·244연대가 배치된 반면 안덕 등지에는 포병부대 등이 집중 배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거린사슴의 갱도는 대규모 병력 보다는 일본군 포병부대의 소규모 파견대가 주둔했거나 혹은 주둔하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거린사슴 정상부에 서면 일본군이 '복곽진지'(複郭陣地)를 구축한 영아리와 돌오름, 제주서남부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와 관련 강순원 자문위원은 "우보악에 박격포 29대대가 주둔하는 등 주변 상황으로 볼 때 거린사슴은 포병부대의 파견대가 주둔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며 "일본군 주둔실태를 밝히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서귀포시 색달동 허경화 옹]"1일 4교대로 하루에 3m씩 팠어"

 허경화 옹(86·서귀포시 색달동·실제로는 1920년 생이지만 호적으로는 1924년 생)은 1944년 1년동안 당시 중문국민학교에서 연성훈련을 받고 다음해 1월 초(음력) 징집됐다.

 징집돼서 간 곳이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으로 여기서 20일 정도 M99식 소총(3인 1자루 )의 분해결합과 사격술 등을 훈련한 뒤 어승생악에서 갱도구축에 동원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가 소속한 부대는 '도리데부대'라고 불렸지. 부대 깃발에는 한자로 '불사조대'(不死鳥隊)라고 써 있었어. '도리데부대'는 굴을 파는 부대로 1945년 음력 2월 초순쯤 밤 12시에 한라산 어승생악으로 이동해서 천막에 잠을 잔 뒤 바로 다음 날부터 굴 파는 작업반으로 배속됐어. 1소대 배속 인원은 40명 정도 됐지."

 허 옹은 갱도 파는 작업을 상세히 기억했다.

 "당시 하루 작업에 3m 정도 파들어 갔어. 목괭이 2명, 담는 사람 2명, 도로코 끄는 사람 등 해서 한 조가 7~8명으로 구성됐는데 1일 4교대로 밤낮없이 굴을 팠어. 그렇게 해서 파들어간 굴은 1백50m쯤 됐어. 굴은 우물정(井)자 형태로 팠지."

 허 옹은 어승생악에 8개월 정도 있었는데, 날짜로는 7개월 정도로 기억했다.

 "나는 주로 굴을 파고 흙을 밖으로 내치는 작업을 했어. 양쪽에 나무기둥을 세우는 것은 목수 등 군속(노무자들로 주로 한국사람 이라고 함)들이 했지."

 허 옹은 "당시 굴은 목괭이로 팠는데 가스등을 켜고 오랫동안 작업하다보니까 폐가 나빠져서 그 후 6개월 동안 치료받은 적이 있고 지금도 폐가 안좋다"고 후유증을 호소했다.

 또 1소대에 일본군 '고쪼'(부사관급·30세 정도로 기억)가 1명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제주사람들로 사계·구좌 등지에서까지 동원됐다는 것. 중문면에서는 허 옹 혼자였는데 이등병으로 가서 일등병으로 진급하자 해방됐다고 말했다.

 "굴을 파다가 소대가 전부 정뜨르로 가게 됐다고 해서 어승생악에서 걸어서 이동했지. 그때 정뜨르가 가득했어. 거기서 대대장이 '여러분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십시오'라고 해서 일본천황이 항복한 것을 8월 17일에 알았지" 하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허 옹은 또 해방 후 3년이 지난 무렵에 모라이악 굴에 '금숭'(송아지)이 떨어져 그 때 굴(1곳)을 보았고, 우보악에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일본군들이 굴(갱도)을 팠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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