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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33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11. 24.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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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1사단 주둔지 (24)녹하지오름
대규모 갱도 갱목설치 현장 생생


한라일보 : 2006. 11.16.

▲녹하지오름 갱도 내부에 60여년 전 설치한 갱목이 벽면에 세워져 있다(사진 위). 취재팀이 녹하지오름 갱도 내부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사진 가운데)과 녹하지오름 갱도 내부에서 입구 쪽을 바라본 모습,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4·3'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녹하지오름이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의 주요 거점진지로 대규모 갱도가 구축됐음이 확인됐다. 또한 갱도 내부에는 60여 년 전 설치했던 갱목이 원상대로 남아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갱도 구축 당시 세워진 갱목이 그대로 남아있는 현장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9일 탐사에 나선 녹하지오름(鹿下旨岳·서귀포시 중문동 소재)은 1948년 발생한 '4·3' 당시 토벌대 주둔지로 익히 알려져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대규모 갱도를 구축한 사실은 거의 묻혀져 왔다. 제주도가 2003년에 발간한 보고서에도 매몰된 소규모 갱도 흔적 정도만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취재팀은 이날 골프장을 가로질러 녹하지오름의 서사면으로 진입했다. 가파른 계곡을 낀 오름능선을 누비면서 확인한 갱도는 무너진 현장 7~8곳 정도. 하지만 북사면에 접어들면서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녹하지오름 북사면과 북동사면의 4부 능선을 중심으로 취재팀은 총 1백20여m에 이르는 3곳의 갱도를 찾아냈다. 갱도 내부는 단순직선형이 아니라 작은 공간이 마련돼 있는 등 치밀한 구조를 보인다. 또한 주변에는 미확인 갱도 및 함몰흔적이 7~8곳 산재해 있다.

 60여 년 전 설치한 모습 그대로 갱목이 남아있는 갱도는 길이가 50여m 정도(폭 120cm, 높이 170cm) 된다. 갱도 내부에는 천장을 가로질러 갱목을 설치하도록 한 홈도 확인된다. 갱목홈 바닥에는 밑둥만 남아있는 갱목도 여럿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시의 흔적들은 갱도내부의 갱목 설치 등 구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현장이다.

 이날 탐사에서는 골프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갱도 입구가 막혀버린 곳도 확인됐다. 이를 보여주듯 갱도내부에서는 골프공이 발견되기도 했다.

 "60여년 전 만든 갱도 내부에서 골프공이라니… ."

 아마도 골프공은 골프장쪽의 입구를 막는 과정에서 흙더미에 쓸려 갱도 내부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들이 녹하지오름 일대에 대규모 갱도를 구축한 것은 무슨 때문일까.

 우선 주변 오름과 해안까지 조망이 가능한 입지적 조건이다.

▲녹하지오름 갱도 내부에서 발견된 골프공.

 녹하지오름은 남서쪽으로 우보악과 군산, 서쪽으로는 모라이악 병악, 북서쪽으로 영아리오름과 돌오름, 북동쪽으로 거린사슴 등의 중심부에 있다. 모두가 일본군 갱도진지등이 구축된 오름들이다. 산방산 너머로는 제주서남부 해안이 잡힌다. 녹하지오름 정상부에는 가로 세로 1.5m 정도 되는 참호도 만들어져 있다.

 천제연폭포의 지류와 본류가 녹하지오름을 끼고 흐르는데서 알 수 있듯이 수량 또한 풍부한 이점을 안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주서남부 해안과는 직선거리로 16km 정도 떨어진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제주서남부 해안의 단산~산방산~월라봉~군산에 이르는 주저항진지 라인이 무너질 경우 녹하지오름 일대가 제2차 저지선을 구축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녹하지오름 위쪽으로는 돌오름 등 복곽진지가 구축되고 있다. 그야말로 최후의 저지선이 뒤를 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녹하지 주변 오름에는 취재팀의 탐사 결과 소규모 갱도 등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녹하지오름이 아마도 이 일대 일본군의 거점진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겨울철 사슴들이 먹이를 찾아 내려왔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녹하지오름은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역사현장이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제주시 도남동 강용택씨]"영아리 돌오름 등 갱도구축"

 안덕면 상천리가 고향인 동양화가 강용택씨(1931년 생·제주시 도남동)는 광복되던 해 15세로 1945년 여름 화순해수욕장에서 당시 산방산·월라봉 일대에 주둔한 일본군 연대장 모리야마(森山)대좌를 만난 일이 있다. 강씨는 당시를 기억하며 본보 특별취재팀에 자신의 그린 모리야마 대좌의 얼굴그림을 보내왔다. 또 취재팀과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모리야마 대좌는 40대로 보였습니다. 화순 경내에 살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씨는 1945년 8월 초에 모리야마 대좌를 만났다며, 그 후 얼마 안돼 일본이 패망을 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또 형제섬 부근에 일본군 수송선들이 정박을 하면 종선으로 화순항으로 군수물자 등을 실어날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45년 초부터 화순항으로 많은 물자들이 들어오고, 관동군 역시 화순항으로 들어와 3열종대로 감산리까지 행군했다고 증언했다.

▲모리야마 대좌 초상화
 강씨는 이어 고향인 상천리 경내에는 후꾸이(福井)중위가 이끄는 후꾸이부대가 주둔했고 병악과 영아리 돌오름에도 굴(갱도)을 팠다고 말했다. 녹하지오름에서 돌오름 사이에 천막을 배치하고 일본군들이 주둔했다는 것.

 "미군의 B29폭격이 이뤄진 시점은 1944년 부터로 기억합니다. 당시 화순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서 기억하고 있죠." 그러면서 당시 화순국민학교에는 야전병원도 설치됐었다고 설명했다.

 강씨는 그러면서 "일본군은 패전을 하자 모슬포 비행장에서 형제섬을 과녁삼아 탄약을 소모하기 위해 계속 밤에 포사격을 가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패망직전에는 모슬포 비행장에 아카톰보가 20~30대 정도 있었고 일본 조종사들이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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