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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일제하 일본군 주둔실태 35

마감된 자료-------/숨겨졌던日戰跡地

by 자청비 2006. 12. 2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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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1사단 주둔지 (26)빈내오름의 갱도
오름사면따라 갱도 줄줄이


한라일보 : 2006. 12.07

▲빈내오름 정상부에 암괴를 이용해서 만든 일제군사시설. 수직갱도 내부에서 관통된 입구가 보인다. /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빈내오름(애월읍 봉성리 소재)은 지도에도 그 이름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한 오름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오름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주목한 오름중의 하나다. 오름 내부는 일본군이 파놓은 지하갱도로 신음하고 있다. 전쟁의 상처로 곪아가는 오름이 어디 이곳 뿐일까.

 빈내오름 탐사에 나선 특별취재팀은 무성한 가시덤불을 헤집고 다니느라 '전쟁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아침부터 반나절을 헤맨끝에 갱도를 찾은 지점은 오름 정남쪽 사면 계곡 바로 위 지점이다. 물이 바짝 말라붙은 계곡은 안덕계곡을 이루는 창고천의 지류다.

 특별취재팀은 이 곳에서 나란히 늘어선 갱도(해발 575m 지점) 5곳을 확인했다.

▲도면

 송이층을 파고 들어간 갱도는 길이 80m 규모<도면>를 비롯 40m, 25m, 20m 등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갱도의 폭은 1m 내외, 높이는 170cm~190cm로 일정하게 만들어졌다. 또 갱도 내부에는 등잔홈 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하나의 갱도는 길이가 8m 정도에 불과하나 내부 폭이 250cm 정도로 가장 넓다.

 이곳의 갱도는 각각 15m 내외의 거리를 두고 만들어졌다. 아마도 공사가 더 진전됐더라면 갱도내부는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빈내오름의 갱도는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다. 당시 일본군들이 미군 등 연합군과의 결전에 대비하기 위해 제주섬에서 최후의 옥쇄작전을 벌이려던 무모한 전쟁야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빈내오름은 모슬포 해안과는 직선거리로 20km 정도 떨어진 산중이다. 해안가 뿐만 아니라 산중에도 대규모 갱도를 구축해 놓은 것이다.

 빈내오름에서는 정상부에도 일본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오름 정상부에 암반을 이용해서 만든 수직갱도(해발고도 662m 지점)를 만드는 등 요새화 한 것이다. 수직갱도는 정상부 암반 밑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2~3평 정도의 공간 바닥에 만들어져 있다. 규모는 1.6×1.6m, 깊이 3m 정도다. 공간 내부는 양쪽으로 트여 조망이 가능하다.



 

▲빈내오름 정남쪽 사면의 갱도내부. 벽면에 등잔홈이 일정하게 나있다.

 이 곳에서는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 산방산 군산 모슬봉이 내다보인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당시 미군이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던 모슬포 일대 해안과 오름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다. 주위로는 한대오름 돌오름 영아리 왕이매오름 다래오름 등이 늘어서 있고, 오름을 둘러싸고는 골프장이 조성돼 있다. 주변에는 예전에 화전을 하던 '솔도'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어떤 부대가 주둔했을까.

 이 시기 일본군의 비밀전보문을 들여다보자. 비밀전보문에는 1945년 7월 10일 무렵 일본군 제58군직할부대인 제12포병사령부가 제121사단 작전구역인 다래오름으로 진출한다. 다래오름은 빈내오름의 북쪽에 있는 오름이다. 때문에 빈내오름 역시 일본군 포병부대의 예하부대가 주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빈내오름의 대규모 갱도는 이러한 일본군 주둔실태를 보여주는 중요한 현장이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전남 해남출신 김장순씨]산방산 갱도 해남지역 광부 투입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에 전남 해남지역의 광부들이 산방산 갱도구축에 동원됐고 선박침몰로 1백5명이 사망했다는 김장순씨(76·사진·호적상 1933년 생)의 증언은 여러모로 비상한 관심을 끈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갱도구축을 위해 당시 전남 해남군 소재 '옥매산광산'의 광부 2백50명의 동원된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옥매산광산은 알루미늄과 석회석 명반석 등을 채굴하던 광산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또 이들 가운데 1백5명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선박침몰로 사망했으나 사건 진상 등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1945년 3월 일본인이 운영하던 옥매산광산의 천전(淺田)산업주식회사가 사람들을 모집 2백50명이 화물선 3척에 나눠타고 성내포구(제주시 산지포구)로 입항한다. 제주로 온 옥매산광산 광부들 중에는 김씨의 아버지(김현오·당시 39세)와 숙부도 있었다. 사람들은 45세 미만이 대부분으로 그 곳에서 1박한 뒤 다시 그 배를 타고 모슬포로 이동한다. 이어 '함바집' 형태의 군인막사에서 이틀 정도 잔 뒤 산방산 부근에서 천막을 치고 거주하면서 굴(갱도)을 뚫었다.

 김씨는 이에 대해 "제주 사람들이 굴(갱도)을 파는 기술이 없어 옥매산광산의 광부들을 불러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갱도를 뚫는 상황과 관련 "3개조가 1개반이 돼 낮과 밤을 교대로 굴을 팠다"고 증언했다. 1개조는 4명으로 구성됐으며, 2명이 구멍을 뚫고 발파하면 2명은 돌을 내다버리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15세인 김씨는 "가마니로 '단까'를 만들어 돌을 날랐다"면서 "한라산이 보이는 방향 중간지점에서 굴을 팠다"고 회상했다. 또 '함바'에서 잠을 자면서 밥은 해먹었으며, 소·말이 먹는 물을 먹으면서 살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굴은 '노미'로 구멍을 뚫고 대나무로 짓이겨서 심지를 넣고 가마니 등을 쒸워서 발파했다"고 덧붙였다. 산방산에서 10여일 정도 일하면서 2m 정도 굴을 판 것으로 기억한다는 김씨는 "당시 일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는 바람에 아버지·숙부와 헤어지게 됐다"고 사연을 이야기 했다. "제주에 올때는 2백50명이었던 사람들이 돌아갈때는 2백10명이었다"며 나머지는 공사가 힘들어 자신처럼 도망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

 또 "산방산에 처음 도착했을때는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상태였다"며 "토목공사만 하고 발파공사는 엄두도 못내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주로 올 때는 일당이 아니고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쌀·납작보리·수수 등 배급을 주기로 했다"며 당시 배급은 6홉인데 다 주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그 후 1960년 무렵 추자도로 가서 정착했다가 1985년 제주로 와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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