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1사단 주둔지 (25)돈두미와 영락리해안
해녀 생활터전도 일본군 진지구축
한라일보 : 2006. 11.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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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 '목저문여덕'서 발견
…착암기 구멍 뚜렷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주둔 일본군들이 해녀들의 물질공간인 바닷가에도 참호를 구축한 현장이 확인됐다.
본보 특별취재팀은 지난 18일 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 해안가에서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바위를 깨고 구축한 교통호 형식의 진지를 처음 발견했다.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속칭 '목저문여덕'이라 불리는 이곳은 썰물 때는 걸어서 갈 수 있지만 밀물 때는 하나의 섬이 되기도 한다. 면적은 약 250㎡ 안팎으로 주변에 해산물이 많아 해녀들의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일본군은 이 곳에 검은 현무암 암반을 깨고 길이 10m 정도의 긴 도랑처럼 진지를 만들었다. 규모는 폭이 70cm에서 160cm, 높이는 대략 1m 안팎으로 동동남에서 서서북 방향으로 나 있다. 현무암 바닥에는 바위를 뚫은 흔적인 착암기 구멍(직경 7.0cm) 10곳이 생생하다. 또 시멘트 흔적도 볼 수 있다.
특별취재팀을 안내한 영락리 주민 홍창언씨(1937년 생)는 일본군들이 돈두미오름에 갱도를 구축하는 시기에 '목저문여덕'의 진지도 만들었다고 한다. 바다와 직접 맞닿아 있는 이 곳은 제주 남서해상으로 왕래하는 선박의 감시가 용이한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일본군이 해안가 둔덕에 진지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목저문여덕'에서는 또 일본군이 패전 뒤 기뢰폭발로 암반이 떨어져나간 곳도 확인됐다. 홍씨에 따르면 광복 후 3~4년 정도 지난 뒤에 기뢰(혹은 어뢰)가 이곳 해안까지 흘러와 폭발했다고 한다. 호젓한 바닷가에 무슨 기뢰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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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군은 제주 서남해안으로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바다까지 온통 기뢰를 깔아놓는다. 즉 1945년 7월 20일 무렵 일본군은 마라도를 중심으로 반경 20㎞ 지역에 기뢰 1천2백개를 부설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까지 파도를 타고 흘러들어와 폭발한 기뢰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본군들은 '목저문여덕'과 그리 멀지 않은 영락리 돈두미오름(표고 41m)에도 갱도진지를 구축했다. 돈두미오름의 갱도진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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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홍씨는 대략 50m 규모 등을 포함 6~7개의 갱도와 수직갱도가 돈두미오름에 구축돼 있고, 그 내부에는 공간이 여러 개 마련돼 있다고 말했다. 돈두미오름의 갱도는 일본군의 패전 뒤 소가 떨어져 죽는 등 피해가 잇따르자 입구를 막아놓은 상태다.
돈두미오름과 '목저문여덕' 일대 일본군은 어떤 부대일까.
이와 관련 돈두미오름과 인접한 녹남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정읍 신도1리 녹남봉은 제주섬 최서단의 '전진거점진지'로 구축된다. 취재팀의 탐사결과 이 곳에는 일본군 제111사단 산하 243연대본부인 가마오름에서 파견나온 부대가 갱도 등을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다. 병력은 1개 소대 정도였다고 마을 사람들은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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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볼 때 돈두미오름 역시 가마오름에서 파견된 일본군이 주둔했고, 병력도 비슷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은 영락리 주민들의 증언에서도 뒷받침된다.
즉 가마오름에서 파견된 일본군은 돈두미오름에 갱도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이 곳과 불과 직선거리로 3백미터 정도인 '목저문여덕'에도 참호를 만들고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는 것이다.
영락리 해안의 '목저문여덕' 진지는 일본군이 제주도민을 볼모로 일본토사수를 위해 제주섬을 요새화 하는데 얼마나 혈안이 돼 있었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특별취재팀
[현장인터뷰/대정읍 영락리 김수진·강성익씨]돈두악 정상부에 해안감시초소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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