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제111사단 주둔지 (22)영아리오름
오름은 전략적 요지 전쟁승패 좌우
한라일보 : 2006. 11.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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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도면, 분홍색 꽃망울을 터뜨린 이질풀, 갱도내부에서 발견된 소총 탄피, 갱도내부 바닥의 그릇 파편/사진=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 |
갱도 내부에서 M1소총 탄피 발견 관심
북쪽 사면에 갱도 함몰흔적 5~6곳 확인
분홍색 꽃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질풀이다. 영아리오름(표고 693m) 길섶에서 만난 이질풀은 가녀린 꽃대에 분홍색 꽃을 살짝 피워냈다. 이질풀이 새삼스레 눈길을 끈 이유는 일제강점기 일본군과 관련해서다. 이질풀뿌리는 설사 등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식수를 봉천수에 의존해야 했던 일본군은 자주 배탈이 났고, 이질풀뿌리를 끓여먹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전적지 탐사단의 오문필 자문위원(한라산등산학교장)은 "당시 국민학교 학생들이 이질풀 뿌리를 캐러 다녔다"며 '이질풀공출'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영아리오름 일대서 마주치는 또 다른 풍경하나는 대나무숲이 많다는 것이다. 대나무숲이 자리한 곳은 예전 화전마을인 '조가동'-조씨 성이 많아서 그렇게 불렸다고 함-터다. 마을터 인근에는 수량이 풍부한 봉천수가 있다. 제주의 여느 오름처럼 영아리 역시 제주인의 삶의 애환과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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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들이 날아다니는 영아리오름 갱도 내부 | |
영아리오름은 역사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주둔 일본군의 전쟁야욕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별취재팀은 영아리오름에 대한 탐사에서 갱도진지와 매몰된 흔적 등을 찾아냈다. 오름사면 7부 능선 쯤에 위치한 갱도는 25m 정도의 소형이다.<도면> 입구는 북북동 방향이며, 사각형의 참호가 있다. 취재팀의 인기척과 랜턴불빛에 놀란 박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면서 내는 날갯짓 소리가 60여 년 동안의 고요와 적막을 깨트린다.
취재팀은 갱도 내부를 조사하던 중 바닥에 떨어져 있는 M1소총 탄피 1개를 발견했다. 높이 30cm 크기의 단지와 작은 종지 하나도 찾아냈다.
M1소총 탄피는 언제 것일까.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주둔 58군사령부 산하 일본군은 M99 소총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때문에 영아리오름 갱도내부의 소총 탄피는 1948년에 발생한 '4·3사건' 당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혹시 갱도 안에서 '4·3' 당시 총격전이 일어났거나 학살이 자행됐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갱도내부에서는 더 이상의 탄피를 찾아낼 수 없었다. 4·3과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 일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취재팀은 또 영아리오름 북쪽 사면에서 뚜렷하게 남아 있는 갱도 함몰흔적을 5~6개 확인했다. 곳곳에 참호 같은 시설도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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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리오름 갱도 입구(사진 위)와 함몰된 갱도흔적을 취재팀이 조사하고 있다. | |
이로 미뤄 영아리오름에도 상당수의 갱도가 구축됐거나 구축과정에 일본군이 패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58군배비개견도에도 영아리오름 일대는 '복곽진지'(複郭陣地)로 나타난다.
복곽진지는 '주저항진지'가 함락됐을 경우 최후의 저항거점으로 마련됐다. 영아리오름 정상부에 서면 왜 일본군이 이 곳을 복곽진지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거린사슴·녹하지·모라이·군산·월라봉·송악산·산방산·단산·모슬봉·광해악·원물오름·저지악·당오름·노루오름·삼형제오름·법정악·돌오름 등 등…. 얼핏 헤아릴 수 있는 오름만도 20여개는 된다.
이와 관련 오문필 위원은 재미난 표현을 했다.
만약 당시 제주도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면 승리를 결정짓는 요인 중 하나는 결국 '오름 따먹기'라는 것이다. 즉 주요 길목에 있는 오름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일본군은 제주도민들을 동원해서 오름 지하에 대규모 갱도들을 만들고 최후의 옥쇄작전을 준비했던 것일까. 그 전쟁야욕이 빚어낸 상처투성이 오름은 60여년 전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탐사포커스]일제 군사시설 피신처 학살터로 이용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해안가나 오름 곳곳에 파 놓은 갱도 등 군사시설은 '4·3' 등 해방공간으로 이어져 피신처 또는 학살터 등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모슬포 송악산 알오름의 탄약고 터다. 일제 당시 탄약고 터인 이 곳은 예비검속사건으로 희생돼 암매장됐던 비극의 역사현장으로 현재 유가족 등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제주시 별도봉의 갱도 역시 '4·3' 당시 주민들의 학살터로 이용됐다고 전해진다.
안덕면 당오름의 경우는 '4·3' 당시 피난처로 이용됐다. 이 곳에는 오름 정상부 능선을 관통한 갱도와 디귿자형 갱도 등이 구축된 사실이 밝혀졌다. 당오름 갱도 내부에는 피난민이 만든 석축 등을 볼 수 있다.
영아리오름의 갱도 또한 '4·3'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나 추측된다. 하지만 영아리오름이 자리한 안덕면 광평리 일대에 대한 '4·3' 관련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다. 새신오름 갱도 등도 4·3과의 연관성이 주목되나 아직까지 관련 자료나 증언등이 확보되지 않고 있다.
이외에도 일제당시 많은 갱도와 군사시설들이 4·3 등 해방공간의 제주역사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사연구 작업은 미진한 실정이다.
미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일본토 사수를 위해 만든 일본군 군사시설이 어떻게 해방공간에서 이용됐는지 등에 대한 조사연구 작업도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