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를 보면 왠지 안타까움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약간 헝클어진 턱수염, 부자연스런 쌍꺼풀, 뭔가 영양섭취가 덜된 듯한 야윈 모습에다 노장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이고 다닌다. 게다가 한물갔다는 주위 평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한다. 집안의 농사를 온통 책임지는 듬직한 소를 연상케 한다.
그의 나이 이제 37세, 우리 나이로 38세다. 마라톤선수로 치면 환갑도 지난 나이일 터. 그런데도 마라톤 현장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부지런한 연습으로 지난 서울국제마라톤에서 드라마같은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한물갔다는 주변의 평가에 대해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응수했다. 마라톤계에선 뛰어난 후배가 없어 마라톤을 떠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보다 뛰어난 후배가 있으면 그는 오히려 부담감을 훨훨 털어내고 더 잘 달릴 것 같다.
그는 지금까지 서른일곱 번 풀코스를 뛰었고 그 가운데 서른다섯 번을 완주했다. 뛰는게 좋아 무작정 시작한 마라톤이다. 이봉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갑내기인 황영조다. 그는 황영조같은 천부적인 폐활량을 타고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짝발은 그를 달릴 때마다 고통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그는 짝발의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내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항상 황영조의 그늘에 가려졌다. 시대는 두명의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봉주는 아랑곳 않고 묵묵히 달렸다. 그리고 황영조가 은퇴를 고민할 무렵인 1996년 후쿠오카 마라톤 우승과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로 비로소 늦깎이 마라토너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이후 소속팀이 분열되면서 마라톤 인생의 최대 고비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속팀도 없는 상태에서 여관방에서 합숙훈련을 한 끝에 2000년 도쿄마라톤에 출전해 2시간7분20초라는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했다.
이어 같은 해 온 국민의 기대를 안고 나섰던 시드니올림픽에서 레이스도중 넘어지는 바람에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슬럼프에 빠져 헤메다가 은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훌훌 털고 일어섰다. 이듬해 4월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한 그는 1947 서윤복(2:25:39 World Best)과 1950년 함기용(2:32:39)에 이어 51년만에 한국에 우승을 안겼다.
다시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아테네의 뜨거운 뙤약볕을 이기지 못하고 14위에 그쳤다. 주위에선 이제 그만 은퇴를 고려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마라톤계에서는 이봉주의 대안 찾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그는 지난해 도하아시안게임에서는 후배들에게 길을 양보했다. 그러나 이봉주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이봉주는 42.195㎞ 코스를 뛰는 게 오히려 쉬울 정도로 심장이 터질듯한 파란만장한 인생의 길을 달려왔다. 그가 그처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성실함 때문이었다. 황영조가 '달려오는 트럭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고 토로한 그 고통을 이봉주는 묵묵히 감내하면서 불혹의 목전까지 달려왔다. 그러면서도 전혀 젠 체하는 법도 없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할 것 같은 순박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영웅은 어느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보였다고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영웅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호칭을 함부로 붙여서는 안된다. 진정한 영웅은 현장에서든, 은퇴한 후든 자신의 생활이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어야 한다. 갈수록 이기주의와 약삭빠른 상혼이 판치는 이즈음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묵묵히 제 갈길을 가면서 길을 닦아 나가는 이봉주는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에서 대한의 기개를 떨쳤고 이후 우리나라 마라톤 발전에 헌신하셨던 손기정 선생 이후 우리나라 마라톤계의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0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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