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하튼섬 남쪽 3㎞ 지점의 리버티섬에 '자유의 나라'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이 여신상은 뉴욕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이며 세계유산목록에도 등재돼 있다. 이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미국에 선물한 것이다. 이 여신상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0여년만인 1884년 비로소 완성됐고, 그러고도 2년이나 더 지체되다가 1886년 비로소 헌정식이 이뤄졌다.
문인이나 예술가, 과학자, 기타 유명 인사의 탄생 혹은 서거 100주년이 되면 그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갖가지 기념행사가 마련된다.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일이나 사건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도 없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100주년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제주교육이 올해로 근대교육 출범 100주년을 맞이했다. 1907년 제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사립의신학교가 출범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백년전이다. 이제 제주교육은 근대교육 1세기를 뒤로 하고 다시 새로운 세기를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 있다.
그런데 지난 100년의 제주교육을 재조명해보려는 교육계의 움직임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근대교육 출범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조차 별로 없다. 지금 제주교육의 앞에 놓인 '국제화 시대에 맞는 교육인프라 구축'이라는 과제에만 매달리다보니 100주년의 의미를 되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인가.
제주교육은 제주도가 국제자유도시에 이어 지난해 특별자치도로 새롭게 출범하면서 대변혁의 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시기에 맞이한 제주 근대교육 출범 100주년은 그 의미가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21세기의 초입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이 때 지난 발자취를 다시 한번 되짚어보면서 제주교육의 미래비전을 확고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100주년을 계기로 제주교육 100년사에 대한 정리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 앞서 두차례 제작된 바 있는 제주교육사에서 잘못 기술된 부분을 바로잡고 미흡한 부분에 대해 보완해야 한다. 종전보다 더 세부적으로 분류해서 정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제주 근대교육의 문을 연 초대 제주군수 윤원구를 비롯 제주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도 시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공덕을 기릴 만한 인물에 대해서는 흉상(또는 동상)을 건립하는 방안도 마련돼야 할 것이다. 이같은 일은 언젠가는 제주교육계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근대교육 출범 100주년을 맞은 지금이 아마도 가장 적절한 시기가 아닐는지. <2007. 06.12>
관련기사
[특별기획/제주근대교육 1세기 어제와 내일](1) 해방 이전
한라일보 : 200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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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대에 민족의식 일깨워
나라 잃은 日帝때도 교육열 매우 높아
"제주사회 선도하는 강력한 원천 역할"
○… 지난 1907년 제주공립보통학교 개설로 시작된 제주 근대교육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했다. 제주 근대교육 1백년의 역사를 불과 5차례 기획으로 마감하는 것은 미흡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도내 교육계와 사회 각계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차원에서 제주 근대교육의 여정과 주요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제주교육의 미래를 조망해본다. <편집자주>…○
제주도에서 근대교육의 기원은 통상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주북교의 전신)와 사립 의신학교를 개설한 1907년부터로 보고 있다. 이보다 앞서 제주목(牧)공립소학교가 1896년 인가됐고 같은 해 11월 교원을 발령했던 것으로 당시 관보에 기록돼 있으나 이 학교의 실제 운영여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 1902년 당시 천주교 라쿠르(Marcel Lacrouts·신성여학교 설립) 신부가 뮈텔주교에 보낸 편지에 제주도여학교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나 이 역시 다른 기록은 전혀 없는 상태다. 이와 함께 1906년 10월 제주공립심상소학교가 문을 열었으나 이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였다.
이에 따라 보편적으로 제주 근대교육은 1907년 제주공립보통학교 개설과 함께 시작됐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제주공립보통학교는 당시 제주목사가 사용했던 영주관을 교실로 사용했다. 또 그 해 사립의신학교가 오현단에서 개설됐다. 그러나 의신학교는 1회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하고 1910년 세워진 공립 제주농림학교(현재의 제주관광산업고)에 흡수됐다.
이후 1909년 정의현 성읍리에 정의공립보통학교, 1911년 대정현 안성리에 대정공립보통학교가 각각 출범했다. 또 중등 교육기관으로 사립신성여학교가 1909년 설립인가를 받고 이듬해 봄에 개교했으며, 공립제주농림학교가 같은 해 5월 문을 열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기면서 일제 총독부에 의한 통치가 시작됐다.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황국신민화 등 식민지 지배 교육을 강화했다. 사립신성여학교는 일제의 교사 명도령으로 1916년 7월 자진폐교했다.
경술국치 이후 학교폐쇄 등 탄압정책을 펴던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다소 유화적인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1920년 서귀교를 시작으로 잇따라 보통학교가 문을 열어 '1면(面) 1학교'형태가 갖춰졌다.
일제는 또 1936년 서귀포에 제주도공립농업실수학교를 개설했다. 2년제였던 이 학교는 진학이 목적이 아니라 농촌에서 일할 수 있는 역군을 양성하는 학교로 식민지 지역의 생산능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밖에 '의숙(혹은 사숙)'이라는 명칭의 개량서당과 야학 등 사립학교와 간이학교 등이 세워져 일제하의 민중계몽에 앞장서기도 했다.
박찬식 제주대 교수는 "경술국치 직전 도민들의 힘으로 근대 교육기관을 개설했지만 일제의 교육정책에 설립취지가 꺾여버렸다"며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시작된 제주의 신교육은 수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깨우쳐주면서 제주사회를 선도하는 가장 강력한 원천이 됐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제주근대교육 1세기 어제와 내일](2)해방 이후
한라일보 : 2007. 06.06
"난 못배워도 애들 만큼은…"
어려운 살림불구 자녀교육 최대 관심
해방 이후 3년만에 42개 학교 문열어
1945년 해방이후 도민들의 최대 관심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자녀 교육에 쏠렸다. 이는 곧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미군정이 끝나는 1948년 8월 당시 도내 초등학교는 94개였다. 이 중 52개교는 해방이전 설립됐고, 나머지 42개교가 불과 3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특히 이가운데 78.6%에 해당하는 33개교가 1946년에 문을 열었다.
중학교 역시 급속히 늘어났다. 해방당시 도내 중등학교는 산북의 제주농업학교와 산남의 공립농업실수학교 뿐이었다. 농업실수학교는 1946년 서귀중학교로 승격됐다. 미군정기의 중학교는 당초 사설강습소에 해당하는 중학원으로 설립됐다가 나중에 정규 중학교로 인가됐다. 당시 중학원으로 문을 연 학교는 제주시 9개교, 서귀포시 3개교 등이었다.
김찬흡 북제주문화원장은 해방정국에서 학교가 급격히 늘어난 것에 대해 "일제 시대에 굴종과 치욕을 당한 한(恨)이 교육문제로 표출됐다"고 진단하고 "이는 근면 성실하고 자주·자조정신이 충만한 도민성에 기인했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1948년 '제주 4·3'으로 많은 학교가 화재로 소실돼 지역민들이 쌓아올린 공든탑이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국동란이 끝나는 1953년 도내에는 중학교 22개교, 고교 16개교가 설립돼 중등교육이 크게 발전했다. 또 1952년 5월 2년제 도립 초급대학이 출범하면서 비로소 고등교육도 시작됐다. 도립초급대학은 1955년 4년제로 승격됐다가 1962년 3월 마침내 국립대학으로 이관됐다. 4·3과 한국동란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제주교육은 괄목할만한 진전이 이뤄진 것이다.
1964년 교육자치제가 출범하면서 제주교육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비록 관선이지만 교육위원회가 꾸려졌고 초대 교육감이 선출됐다. 당시 교육현황을 보면 학교수가 초등 94개교, 중 29개교, 고 18개교 등 모두 1백41개교였으며, 학생수 6만1천여명, 교원수 1천2백여명, 재정규모 1억9천4백만원 등이었다.
1990년대들면서 민선 제주도교육위원회와 민선 교육감이 탄생하는 등 사회민주화에 따라 교육계에 대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주교육은 교육자치제가 시작되던 1964년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2007년 4월 현재 교육현황을 보면 학교수는 초등 1백6개교, 중 42개교, 고 30개교, 특수 3개교 등 모두 1백81개교이며, 학생수 10만2천여명, 교원수 5천4백여명, 재정규모는 5천억원에 이른다.
윤치부 제주교대 교수는 "해방이후 제주교육은 중앙집권적 제도하에서 제주만의 독특한 색깔을 갖지 못했지만 대학학력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배출하는 등 교육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발전해왔다"고 진단하고 "이제는 제주의 교육을 되돌아보고 향후 최고의 인재교육시스템을 갖춘 곳으로 만들기 위한 비전이 제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제주근대교육 1세기 어제와 내일](3)주요인물(上)
한라일보 : 2007. 06.07
민족의식·교육열정으로 혼신
1907년 이후 1세기동안 제주교육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데는 수많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노력이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기할만한 인물을 몇손가락으로 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초창기 제주교육 발전에 헌신했던 일부 인사들을 김찬흡 북제주문화원장의 도움을 받아 살펴본다.
초대 제주군수 윤원구, 사립 의신학교 설립
제주 근대교육은 초대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생몰년 미상)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윤원구는 1904년 2월 육군 헌병대 중대장을 지냈던 구한말 무관이었다. 윤원구는 1906년 8월 초대 제주군수로 부임했다가 1908년 12월 면직돼 제주를 떠났다. 일찍이 개화문명에 눈을 뜬 윤 군수는 제주에 부임하면서 국가의 흥망이 학교에 달렸다며 중등학교 개설을 추진했다.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으면서도 윤원구는 지역 유지 뿐 아니라 주민들의 뜻을 하나로 엮어내 사립 의신학교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당시 제주에 유배돼 있던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의 정신적·물질적 도움도 컸다고 한다.
제주출신 첫 중등교사 홍순녕, 학생 의식 계몽 선구자 역할
도내 학교에서 제주출신으로는 첫 중등교사로 알려진 홍순녕(洪淳寧·1887~1949)은 1912년 5월 교사로 발령받아 공립제주농업학교에 부임한다. 제주시 출신인 홍순녕은 일찌감치 상경해 1910년 4월 공립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10월까지 제주농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학교를 그만둔 뒤 독립운동에 관여하면서 일제의 기피인물이 됐던 홍순녕은 1939년 사립화북교 교장으로 취임했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해방직후 제주고등여학교(현재의 제주여중) 초대 교장으로 초빙돼 재직하던 홍순녕은 1949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주위의 권유로 교장직을 사임하고 출마해 당선됐으나 7개월여만에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동생인 홍순만 제주문화원장은 "어릴 때였지만 형은 민족의식이 남다르고 국제정세에 매우 밝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해방후 정계활동 김성숙, 후진위해 신유의숙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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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국회의원으로 정계에서 활동했던 김성숙(金成淑·1896~1976)과 대정중학교 초대교장을 역임한 이도일(李道一·1897~1971)은 일제하에서 대정지역의 문맹퇴치와 교육발전에 헌신했다. 김성숙은 가파도 태생으로 독학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학생신분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1921년 귀향한 김성숙은 민족문화 창달과 후진교육을 위해 가파도에 신유의숙을 개설해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주정공장 경영 이도일, 대정중 초대 교장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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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가파도 태생인 이도일은 경기도에서 사업을 벌여 성공한뒤 귀향해서 대정에서 주정공장을 경영하면서 선도적 사회활동으로 대정 유림과 지역민의 신망을 얻었다. 이도일은 이로 인해 해방후 1946년 11월 설립된 대정중 초대 교장으로 추대됐다. 당시 대정중 교무주임을 맡았던 강달훈 선생(87·대정읍)은 "선생은 고매한 인품과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지역민들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기억했다.
[특별기획/제주근대교육 1세기 어제와 내일](4)주요인물(下)
한라일보 2007.06.06
제주교육 초석쌓기 몸으로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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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응선, 지방교육에 매진
애월읍 태생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관서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대정면장 등을 역임했던 장응선(張應善·1899~1959)은 해방후 정치활동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육에 뜻을 둬 애월중학원 개설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정규 중학교로 인가를 받아냈다.
장응선은 4·3의 혼란기에도 무장 관헌들의 교실 진입을 저지하고, 교사들로 하여금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에게는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도록 교육행정을 폈다.
장응선은 애월중학교에 이어 1952년부터 애월상업고등학교 설립을 서두른 끝에 이듬해 인가를 받아내는 등 지방학생들을 위한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기휴, 실업교육 토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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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휴(李基休·1905~2002)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이 땅에 실업교육의 토대를 마련했다. 표선면 성읍리 태생인 이기휴는 제주농업학교와 전남 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전남 일로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발령받아 후학 양성과 함께 주민생활 개선 등에도 힘써 지역주민들로부터 칭송받았다. 1937년 귀향해 남원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41년 제주도공립농업실수학교(현 서귀산과고)로 옮긴 이기휴는 해방과 함께 농업실수학교 초대 교장을 맡아 1970년 정년퇴직 할 때까지 46년동안 '기술이 실력'이라는 일념하에 학생들에게 헌신하며 도내 실업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육에 몸담았던 네째아들 동진씨(69)는 "아버지는 학교에서건 가정에서건 모든 일에 솔선수범과 실천을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최정숙, 여성교육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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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부터 교육자치제가 시작되면서 초대 제주도교육감으로 최정숙(崔貞淑·1902~1977)이 선출됐다. 지금까지도 전국에서 유일한 여성교육감이다. 최정숙은 사립신성여학교를 1회로 졸업한뒤 서울에서 진명여학교와 경성여고 사범과를 나와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여성계몽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최정숙은 1921년 평생의 동지였던 강평국(姜平國)과 함께 여성 문맹퇴치 강습소 '여수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이후 의사면허증을 따내 무료인술을 베풀기도 했던 최정숙은 해방정국에서 일제에 의해 닫혔던 신성여학원을 개설하고, 1949년 신성여자중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이어 1954년 신성여고를 개설해 초대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제주도 여성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홍정표, 민족의식 고취 헌신
이밖에 홍정표(洪貞杓·1907~1992)는 제주시 출신으로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부터 줄곳 교육계에 몸담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헌신했다. 이로인해 일본인 교장의 미움을 사 서울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홍정표는 1951년 귀향해 서귀농업중학교 교감으로 출발하면서 향토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또 조천 출신의 김문준(金文準·1894~1936)은 조천, 구좌 등지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의 각성을 강조했다.
[특별기획/제주근대교육 1세기 어제와 내일](5-끝)제주교육의 미래
한라일보 : 2007. 06.09
'개인 맞춤형' 교육 추구해야
道, 외국 대학 분교 유치·영어전용타운 추진
공교육 변화 불가피 … 시스템 정비 등 시급
제주 근대교육 1백년을 돌아보고 1백년후를 내다보는 현 시점에서 제주도는 국제자유도시라는 점과 함께 지난해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다. 제주도는 이같은 국제자유도시 및 특별자치도 미래 비전 중의 하나로 교육 개방화·산업화를 내세워 외국 유명 대학 분교의 유치, 영어전용타운 설치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교육 역시 변화가 불가피해지면서 제주교육의 내적 시스템 정비와 혁신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관련 교육 관계자들은 "제주교육은 국제자유도시로서 국제적 교육인프라 구축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제주도교육청은 국제고 설립과 제주형 자율학교 운영을 통해 국제자유도시를 주도하는 인적자원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은 불투명한 실정이다.
제주교대 윤치부 교수는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이 제주교육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지금처럼 서울을 따라가는데 급급해 하는 공교육 형태로는 제주교육 뿐 아니라 제주의 미래가 결코 밝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제주대 양진건 교수는 "제주의 근대교육사를 살펴보면 교육에 대한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60년대 이후 중앙정부가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교육을 주도하면서 제주교육의 독특한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전제, "향후 제주교육은 이러한 역동성을 토대로 자율화와 다양성을 추구하는 교육전략을 새롭게 마련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백년후의 제주교육이 어떻게 변화할 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다. 미래 사회는 제조업이 기계화, 자동화, 로봇화되고 인간은 지능개발에 매달리면서 엄청난 국제경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학자들은 평생교육, 사이버대학, 긴밀한 산학연계, 적시학습(just-in-time e-learning), 영상·인터넷 위주의 교육 시스템, 다양성과 창조성 교육 등이 미래교육의 핵심 코드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제주교육은 개인의 적성 및 능력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추구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또 학교내 의료시설 및 요양공간과 탁아소 등을 갖춰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이 하나로 통합되는 멀티플렉스학교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와 함께 교육 수장의 리더십 뿐 아니라 교육 구성원들의 생각이 크게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한편 유네스코 21세기교육위원회는 미래교육이 지향해야 할 중요한 요소중 하나로 '더불어 사는 학습(learning to live together)'을 제시한 바 있다. 제주인을 모든 지구촌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세계시민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단일민족이라는 전통적인 근대교육에서는 벗어나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교육이 만들어져야 한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오늘날 제주교육이 반드시 감당해야 할 몫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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