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는 임금이었습니다. 훈민정음의 창제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복리후생 정책에도 정성을 쏟았습니다. 우선 세종은 농사직설을 펴내고 농법을 조선에 맞게 개량ㆍ보급해 토지 1 결당 쌀 생산량을 최고 4배까지 증가시킵니다. 또 의녀 제도를 온 나라에 확산시켜 부녀자들의 의료조건을 개선하고, 산모와 남편의 출산휴가를 주었으며, 죄수의 생명보호를 위해 감옥 안에서의 사망자 상세보고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분의 귀천없이 80살이 넘으면 임금이 벌이는 양로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으며, 화재의 위험이 큰 도성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고, 온돌과 마루를 온 나라에 보급시켰습니다. 또 제생원 제도를 개선해 버려진 아이들의 죽음을 막기도 합니다. 세종임금은 이렇게 백성의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임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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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680. 장인이 장이로 바뀐 결과 (2006/05/13)
백제에서는 기와 장인을 ‘와박사(瓦博士)라고 불렀고, 6세기 후반 이들을 왜국에 파견하여 기와제작법을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백제 때는 와박사를 비롯한 장인들이 높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라의 탈해왕은 자신을 본래 단야(鍛冶), 즉 대장장이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신라와 가야의 대형 고분들에서는 집게, 망치, 숫돌, 받침모루 따위의 대장간 도구들이 출토된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미루어 볼 때 대장장이 집단이 상당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우받던 장인들은 조선시대엔 장이로 전락합니다. 가죽공예의 장인을 ‘갖바치’라 하고, 대장아이, 옹기장이 따위로 불리며, 상민이나 천민 등 하층계급으로 천시를 받습니다. 장인들의 이런 신분추락은 결국 뛰어난 겨레문화가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고 맥이 끊기는 안타까움이 되었습니다. |